오징어 덮밥 3인분

2010. 2. 18. 09:47카톨릭 이야기/영성의 샘물

 

 

 

 

 

 

 

 

 

 

 

 

 

 

 

 

 

 

 

 

 

 

 

 

 

 

<오징어 덮밥 3인분>

 양승국신부-

오늘 재의 수요일 점심때까지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단단히 각오를 했기에 점심때까지는 아예 물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었지요.

점심식사도 최소한 간단히 요기만 했습니다. 계속 식탁에 앉아있으면 유혹이 생길 것 같아 빨리 일어섰지요. 그런데 문제는 저녁 식사 시간이었습니다. 평소에는 별로 식욕이 없었는데, 하필 오늘따라 왜 그리도 입맛이 당기던지 신기했습니다

그래도 꾹 참아야했지요. 밥 한 그릇을 게눈 감추듯이 먹고 끝내려고 했는데,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사탄의 소행인지 갑자기 고봉으로 가득 담긴 밥 한 양푼이 제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오늘 따라 국물이 걸죽한 오징어 볶음이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그 순간 제 의도와는 상관없이 손이 저절로 움직였습니다. 3인분은 족히 될 밥에 국물이 "왔다!"인 오징어 볶음을 넣어 열심히 오징어 덮밥을 만들었지요

"아차!" 하고 정신을 차리는 순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오징어 덮밥 3인분은 이미 하나도 남지 않았고, 아침의 굳은 결심은 완전히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오징어 덮밥이란 유혹 앞에 완전히 제 정신을 잃은 제 모습이 한심한 재의 수요일이었습니다.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 제자가 되기 위한 3가지 조건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1. 자기를 버리기

2. 매일 제 십자가를 지기

3. 예수님 뒤를 따르기 

자기를 버린다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이 사순기간 우리가 가장 노력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란 새로운 가치관을 우리 안에 형성시키기 위해 어제의 낡고 닳아버린 우리 자신과 결별한다는 것입니다

그릇 안에 무엇을 담는가에 따라 그릇의 가치는 천차만별입니다

고급 향유가 가득 담긴 그릇은 향유 못지않게 소중하고 가치 있게 여깁니다. 그러나 개밥을 담는 그릇은 사람들의 발길에 자주 차이면서 홀대받는 개밥그릇일 뿐입니다

우리 자신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존 하실 때 우리 역시 덩달아 가치 있는 사람, 존엄성 있는 인간, 아름다운 그릇으로 평가됩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의미는 각별한 새로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기 위해 낡고 퇴색되어 초라해진 우리 자신을 비우는 일입니다. 부족하고 부끄러운 어제의 나와 작별하고 다시 한번 일어서는 일입니다

목숨이 붙어있음을 하느님께서 아직 우리에게 희망을 걸고 있다는 표시로 여기는 일, 다시금 우리의 몫을 살아내는 일, "내 몫이려니" 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일이야말로 자신을 버리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