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고궁 나들이 [서울/창덕궁]

2012. 10. 31. 11:21서울 어디까지 가봤니?/서울 여행지

 

 

 

 

가을 고궁 나들이 [서울/창덕궁]

 

 

고궁중에 창덕궁 후원의 단풍과 설경은 그림같기로 유명합니다.

현재 창덕궁의 단풍은 30%정도 들어 있는것 같습니다

11월 중순까지는 나머지 70%의 즐거움을 나누어 줄것입니다.

후원의 풍광사진에 앞서 궁궐을 먼저 돌아 보도록 합니다

창덕궁은 1405년(태종5년) 조선왕조의 이궁으로 지은 궁궐입니다.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하며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로 불렀다.

임진왜란때 모든궁궐이 불에 타자 광해군때 다시짓고

고종이경복궁을 중건하기 까지 정궁의 역할을 하였다.

조선의 궁궐중 가장 오랜기간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다.

경복궁의 주요 건물들이 좌우대칭의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면

창덕궁은 산자락을 따러 건물들을 골짜기에 안기도록 배치하여

한국 귱궐의 비정형적 조형미를 대표하고 있다. 또한 후원은

다양한 정자, 수목 ,괴석 연못등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다.

현재 남아있는 궁궐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가 탁월한 점에서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돈화문

‘돈화(敦化)’라는 말은 원래 중용에서 인용한 것으로 ‘공자의 덕을 크게는 임금의 덕에 비유할 수 있다’는

 표현으로 여기에서는 의미가 확장되어 ‘임금이 큰 덕을 베풀어 백성들을 돈독하게 교화 한다’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보물 제 383호인 돈화문은 현존하는 궁궐의 대문 중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1412년 5월에 세워졌으며, 1609년(광해원년)에 중수(重修)했다고 한다.

돈화문에는 원래 현판이 없다가 성종 때 서거정에게 분부하여 이름을 지어서 걸게 하였다.

2층 문루에는 종과 북이 있어 정오(正午)와 인정(人定), 파루(罷漏)에 시각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정오를 알리기 위해 북을 치는데 이것을 오고(午鼓)라고 하며, 인정은 통행금지를 알리기 위해

28번 종을 치는 것이고, 파루는 통행금지 해제를 알리기 위해 33번의 종을 치는 것을 말한다.

돈화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남향 건물이고, 좌우 협칸을 벽체로 막아 3문형식 이다.

중앙은 어문으로 왕의 전용 문이고, 좌우문은 당상관이상 높은 관료가 드나들던 문이지만,

 3사(三司: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의 언관은 관직은 낮아도 좌우 문을 드나들게 한 특별한 혜택이 있었다.

 

 

 

 

 

 

 

 

 

 

금천교

 

금천교는 창덕궁의 돈화문과 진선문(進善門)사이를 지나가는 명당수(明堂水)위에 설치되어 있다.

창덕궁의 명당수, 즉 금천(禁川)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려 돈화문 오른쪽까지 와서 궐 밖으로 빠져나가는데,

 이 어구(御溝)물가에는 화강석 6∼7단을 가지런하게 쌓은 축대를 설치하였고, 여기에 금천교를 설치하여 궐내로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금천교는 창덕궁이 창건되고 6년 뒤인 태종 11년(1411)3월 진선문 밖 어구에 설치되었는데,

그 후 숱한 화재와 전란에도 불구하고 창건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현존하는 궁궐 안 돌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규모는 의장(儀杖)을 갖춘 국왕의 행차 때 노부(鹵簿)의 폭에 맞도록 설정되었으며,

상면은 길이12.9m, 너비 12.5m로 정사각형에 가까울 정도로 폭이 넓다.

구조는 하천 바닥의 중앙과 물가에 놓인 기반석을 토대로 홍예를 2개 튼 형식으로 물가의 축대는 부벽(扶壁)구실을 하고 있으며,

 홍예 위에는 장대석 모양의 멍에돌을 얹었다. 다리의 상면은 불룩하게 곡면으로 만들고 바닥을 3칸으로 구분하여 칸마다

장대석을 고르게 깔았으며, 다리 가장자리에는 그 위에 동물상을 조각한 이주석이 세워져 있다.

난간은 머리 부분을 연화보주형(蓮花寶珠形)으로 장식한 법수와 그 사이에 세운 판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판석은 하엽동자기둥(荷葉童子柱)모양의 부조를 중심으로 2칸으로 분절되었고 칸마다 안상을 투각하여 놓았다.

법수 밑에는 멍엣돌 위치에서 돌출된 석재에 짐승머리모양을 환조(丸彫)로 조각하였다.

 다리 측면의 홍예 사이 벽에는 귀면형(鬼面形)이 부조되어 있고, 그 아래쪽의 홍예 기반석 위에는

 남쪽에 해태상, 북쪽에 거북이상 등 환조로 만든 동물상들이 배치되어 있어서 금천의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연출하고 있다.

 

 

 

 

 

 

 

 

 

 

 

 

 

 

 

인정전

‘인정(仁政)’은 ‘어진정치’라는 뜻이며, 인정전은 창덕궁의 법전(法殿)이 된다.

 법전은 왕의 즉위식을 비롯하여 결혼식, 세자책봉식 그리고 문무백관의 하례식 등 공식적인 국가 행사 때의 중요한 건물이다.

광해군 때 중건된 이후 순조 3년(1803)에 일어난 화재로 인한 재건, 그리고 철종 8년(1857년)에 보수공사이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인정전의 넓은 마당은 조회가 있었던 뜰이란 뜻으로 조정(朝廷)이라고 부른다. 삼도 좌우에 늘어선 품계석은

 문무백관의 위치를 나타내는 표시로 문무관으로 각각 18품계를 새겼다. 그러나 정(正)4품부터는

종(從)을 함께 포함시켰으므로 정1품에서 시작하여 정9품으로 끝나며 각각 동, 서로 12개씩 있다.

정조 때 조정의 위계질서가 문란해졌다고하여 신하의 품계에 따른 비석을 세우게 된 것인데,

3품 이상을 당상관(堂上官)이라하고, 3품 이하를 당하관(堂下官)이라 한다.

품계석에 맞추어 동편에는 문관, 서편에는 무관이 중앙을 향해 서는데, 문관은 동쪽에 위치하므로

동반, 무관은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반이라 하였으며 이를 합쳐서 조선시대의 상류 계급인 양반이 된다.

문무관은 임금님을 향해 바라보는게 아니라 문관은 무관을, 무관은 문관을 서로 마주보며 종렬로 서게되는데

임금님께 절을 하라고 “배(拜)-”하는 구령이 떨어지면 홀을 든채 국궁배례하며

서있는 채로 마주보며 절을 하고, 이것을 ‘곡배(曲拜)’라고 부른다.

 

 

 

 

 

 

 

 

 

 

 

 

 

 

희정당

나중에 어전회의실로 사용 되었으나

원래는 임금의 침실에 딸린 편전이다

내부 응접실에는 서양식 가구가 놓여져있다

 

 

 

 

 

대조전

대조전은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왕비의 침전인 서온돌과임금의 침전인 동온돌로 나누어지며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지붕을 하고 있다

 

 

 

 

 

 

 

 

 

 

낙선재

 

낙선재는 창덕궁과 창경궁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맨 좌측에 낙선재가 크게 자리 잡고 그 우측으로 석복헌과 수강재가 연이어져 있으며,

이들 뒤편에는 화초·석물·꽃담 굴뚝 등으로 가꾸어진 아름다운 화계와 그 위의 꽃담 너머로는 상량정·한정당·취운정이 위치해 있다.

원래 왕의 연침공간 조성을 목적으로 낙선재가 지어지고 이듬해에 빈의 처소를 위하여 석복헌을 짓고

수강재를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궁궐 안에 사대부주택형식으로 지은 건물로는 낙선재와 연경당뿐이다.

낙선재는 헌종 13년(1847)에 왕이 왕비와 대왕대비를 위해 마련하여 조선 왕실의 권위를 확립하고

 자신의 개혁의지를 실천하기 위한 장소로 사용했다. 1884년 갑신정변 직후 고종의 집무소로 사용하고

그 후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 이은이 1963년부터 1970년까지 살았으며, 1966년 부터 1989년까지는 이방자여사가 기거하였다

. 낙선재는 비교적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나 석복헌과 수강재는 상당 부분이 변형되어 있다.

낙선재는 남행각에 나있는 정문인 장락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 건너에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로 자리 잡고

그 좌측에 서행각이 남행각과 직교로 연접해 있다. 맨 좌측에 앞으로 돌출한 1칸이 주형 초석 위에 놓여 누마루가 되면서 시선을 끈다.

 누마루 뒤로는 온돌방 1칸을 두고 그 우측으로 대청2칸, 온돌방 2칸, 다락방 1칸을 배열하였으며, 다락방 배면에도 흔치 않은 온돌방을 돌출되게 두었다

. 2칸 대청과 온돌방 앞에는 툇마루가 시설되어 있고,건물 뒤에는 쪽마루가 길게 깔려 있어 공간 간 이동이 편리하다.

 이 건물에는 궁궐의 권위와 위엄을 보여주는 수준 높은 다양한 문양의 창호들이 설치되어 있다. 특히 누마루와

 그 뒤 온돌방 사이의 만월문은 단연 돋보이는 백미로 누마루 공간의 위계를 읽게 한다.

구조양식은 잘 다듬은 화강석 바른 층 쌓기 한 기단 위에 방형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운 물익공 겹처마 팔작지붕 집이다.

물익공은 당초문양으로 세련되게 초각하고 보머리와 보아지도 같은 수법으로 품위 있게 장식하여 궁궐의 면모를 갖추게 했다.

주간은 소로로 수장하고, 누마루의 머름대 아래에는 아름답게 초각한 낙양이 장식되어 있어 누 부분이 더욱 돋보인다.

상부가구는 몸채는 5량가, 누마루는 3량가로 가구하고 미려하게 다듬은 대량 위에 당초문양을 양각한 화려한 제형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게 했다.

낙선재는 궁궐 내의 침전건축과는 달리 단청을 하지 않고 사대부주택형식으로 건축되었으나,

궁궐침전형식이 응용되면서 다른 곳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다양한 문양의 장식이 특히 주목되며,

 조선 후기 건축 장인(匠人)들의 축적된 기량을 엿볼 수 있어 건축적인 가치가 높다.

또한 조선왕가의 실제 침전으로 사용된 역사성도 중요한 건물이다.

 

 

 

 

 

 

 

 

 

 

 

 

 

 

 

 

 

 

 

 

 

 

 

 

 

 

 

 

향나무 (천연기념물194호)

 

 

 

 

 

궐내각사

궁궐안에 관원들이 근무하던 공간으로

흥문관,내의원,규장각,왕의 칙령과 교서를 보관하는 예문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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