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초

2009. 4. 6. 13:17동식물 사진/식물,초목본,수생식물

 

 

 

복수초

 

 

 복수초

 

 

 

 

 

 

 

 

 

 

 

 열쇠구멍으로 본 세상 -  석헌/허경용 -

 

열쇠구멍으로 본 세상
 
산행을 하다보면 낮은 봉우리라도
시야가 훤하게 트여있어 전망이 좋은 곳이 있다.
어떤 봉우리는 높기는 하지만 주변에
키 큰 나무들이 우거져 멀리 볼 수 없는 곳도 있다.
겨우 나무들 사이로 저 아래 시가지가 일부만 보일 뿐이다.
밤하늘 별자리를 보려 해도 가을에만 볼 수 있는
별자리가 있고 봄에만 보이는 별자리가 있다.
스모그로 뿌옇게 된 도심에서는 그것조차 볼 수가 없다.
 
우리에게 보이는 세상은 이렇다.
육안에 보이는 세상도 있고 마음으로 보는 세상도 있다.
시력이 좋고 장애물이 없는 경우에는 멀리까지 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가까운 곳조차도 볼 수 없다.

 

육안으로 보는 세상은 물질의 세계이다.
그래서 장애물이 너무도 많아 넓게 보기란 불가능하다.
눈앞 가까이에 조그마한 장애물만 있어도
거의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장애물이 없다 해도 시력(視力)의 한계성 때문에
멀리 보기가 어렵다.
시각(視角)의 제한성 때문에 머리를 돌리지 않고는
한꺼번에 넓게 보기도 어렵다.
  
마음으로 보는 세상도 언제나 부분적이다.
마음의 눈은 좁은 열쇠 구멍이다.
그래서 전체를 볼 수 없다.
때로는 바늘구멍 보다 더 작아져서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되기도 한다.
마음은 풍선과 같다.


풍선은 마음이고 풍선의 바람구멍은 마음의 눈이다.
풍선을 부풀릴수록 바람구멍은 오히려 더 작아질 뿐이다.
우리는 육안과 마음의 눈만으로 세상을 보며 산다.
그래서 부분적인 삶 밖에 살 수 없다.
전체적인 삶은 불가능하다.

장님처럼 코끼리의 다리만 만지면서 기둥이라고 한다.
꼬리만 만져보고 동아줄이라고 한다.
전체를 볼 수 있는 눈이 뜨이지 않고서
어찌 코끼리를 알아 볼 수 있겠는가!
 
우리는 전체를 볼 수 있는 눈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있는지 조차도 모른다.
그래서 그것을 사용한다는 것은 더욱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세 번째 눈, 영안(靈眼)이 바로 그것이다.
영안(靈眼)은 물질이 아니다.
그래서 비 물질도 볼 수 있고 물체의 방해도 받지 않아
전체를 볼 수 있다.

 

영안(靈眼)으로 보면 코끼리가 보인다.
전체가 확연하게 나타난다.
기둥이 아니고 다리이며 동아줄이 아니고
꼬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과거도 미래도 따로 없고
그것들이 현재의 한 부분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영안(靈眼)이  트인 사람은
소위 과거나 미래라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말해진다.
그들은 전체를 보기 때문에
현재 속에서 모든 것을 본다는 것을
우리들은 모르고 있다.
존재는 지금에 있을 뿐이다.

시간이란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발명품이다.
그래서 존재계는 과거와 미래를 모른다.
오직 현재만을 알뿐이다.
현재는 시간이 아니다.
언제까지나 그대로 존재하는 영원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지금, 여기에 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영원 속에 살라는 말이다.
시간이 흘러간다고 말들 하지만
그것은 그대로 있을 뿐이다.
그 속에서 우리가 존재하고(살아가고)있는 것이다.
그 위를 우리가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만유가 그 위를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영안(靈眼)이 트이지 않은 우리들은
열쇠구멍으로 세상을 내다보면서
다리를 기둥이라고 하고
꼬리를 동아줄 인줄만 알고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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