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 문정희 시인

2019. 9. 10. 08:04카테고리 없음

 

  

        문정희 시인

 

 

  내 친구 연이는 꿈 많던 계집애
  그녀는 시집갈 때 이불보따리 속에
  김찬삼의 세계여행기 한 질 넣고 갔었다
 
  남편은 실업자 문학청년
  그래서 쌀독은 늘 허공으로 가득했다.
 
  밤에만 나가는 재주 좋은 시동생이
  가끔 쌀을 들고 와 먹고 지냈다.
 
  연이는 밤마다
  세계일주 떠났다.
  아테네 항구에서 바다가재를 먹고
  그 다음엔 로마의 카타꼬베로!
  검은 신부가 흔드는
 
  촛불을 따라 들어가서
  천년 전에 묻힌 뼈를 보고
  으스스 떨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또 떠나리.
 
  아! 피사, 아시시, 니스, 깔레 ….
 
  구석구석 돌아다니느라
  그녀는 혀가 꼬부라지고
  발이 부르텄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그만
  뉴욕의 할렘 부근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밤에만 눈을 뜨는
  재주꾼 시동생이
  김찬삼의 세계여행기를 몽땅 들고 나가
  라면 한 상자와 바꿔온 날이었다.
 
  그녀는 비로소 울었다.
  결혼반지를 팔던 날도 울지 않던
  내 친구 연이는
  그날 뉴욕의 할렘에 쓰러져서 꺽꺽 울었다.

 

 

 

 

사진 - 올림픽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