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진무영 순교성지 (강화천주교회)

2011. 6. 12. 03:49카톨릭 이야기/천주교 성지순례

진무영은 1700(숙종26)에 해상 방어를 위해 설치된 군영이며

동시에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1968년 5월 22일 최인서(崔仁瑞) 요한,장치선(張致善)

박서방,조서방등이 순교 하였다.

특히 최인서와 장치선은 병인박해로 성직자 12명중 9명과

신자 1,000여명이 처형되자 생존 성직자중 한분인 리넬 신부를

배로 천진으로 탈출 시키고, 서양 배를 불러다다가

신교의 자유, 남은교우들의 구출, 성교(천주교)전파, 등의 목적으로

상해까자 다녀왔다는 죄로 처형 되었는데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면서 까지, 성직자의보호,신교의자유, 그리고 복음전파의

노력하는 삶을 살다가 ,마침내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이곳 진무영 순교지엔 천주교 강화성당이 세워졌고 성지는 성당내에 있습니다.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643 강화성당 내
지리자표 : 북위 37°44′53″ 동경 126°29′12″
연락처 : 강화 성당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5리 643) (032) 933-2282 FAX (032) 934-5622
홈페이지 : 없음
미사시간 : 평일 : (월목) 오전 6:00, (수) 오전 10:00, (화, 금) 오후 7:30, (토) 오후 3:00, 5:00
주일 : 오전 6:00, 11:00, 오후 7:30

병인양요를 촉발시킨 최인서, 장치선 등의 순교 터

강화가 천주교와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839년 기해교난을 겪으면서였다. 그동안 천주교 신앙 유입의 통로는 육로뿐이었다. 하지만 육로의 경비와 기찰(譏察)이 심해지자 해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강화도와 황해도 연안의 뱃길이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강화도는 19세기 후반, 한국 역사에서 동서양의 사상과 문화가 만나 첨예한 갈등을 빚은 곳으로 상징되는 곳이다. 이러한 연유로 1866년 병인(丙寅)년부터 시작한 박해로 강화도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으나 현재 알려진 순교자로는 1868년 5월 22일 진무영(鎭撫營)에서 최인서(崔仁瑞, 요한, 애오개 회장, 59세), 장치선(張致善, 張周基 요셉 성인의 조카, 59세), 박서방(朴順集 베드로의 형), 조서방(趙參奉의 부친, 50여세) 등이다.

특히 최인서와 장치선은 병인박해(1866-1871)로 성직자 12명중 9명과 신자 10,000여 명이 처형되자 생존 성직자중 한분인 리델(Ridel) 신부를 배로 천진(天津)으로 탈출시키고, 서양 배를 불러다가 신교(信敎)의 자유, 남은 교우들의 구출, 성교(聖敎 : 천주교) 전파 등의 목적으로 상해(上海)까지 다녀 왔다는 죄로 처형되었는데,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면서 까지 성직자의 보호와 신교의 자유, 그리고 복음 전파를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다가 마침내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그리고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때 박상손(朴常孫),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등이 갑곶나루터(甲串津頭), 일명 '막구터'에서 목을 베어 말뚝에 올려 놓아 천주교를 경계하도록 하였다.

진무영(鎭撫營)은 조선시대에 해상경비의 임무를 맡았던 군영이며, 동시에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이기도 하다. 1700년(숙종 26) 강화부(江華府)에 그 본영을 설치하고, 1779년(정조 3) 통어영(統禦營)을 병합하였다가 1789년(정조 13) 다시 분리하였다. 특히 1866년의 병인양요(丙寅洋擾) 이후, 외국 선박의 출입이 빈번하여 쇄국정책을 쓴 당시로서는 수도의 관문을 지키는 국방상 중요한 군영이었으므로, 그 유지를 위해 국가에서 포량미(砲糧米)라는 특별세를 설정, 군영의 경비에 충당하였다. 1887년(고종 24) 심영(沁營)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진무영에는 강화유수(江華留守)가 겸임하는 사(使:정2품) 1명, 중군(中軍:정3품) 1명, 진영장(鎭營將:정3품) 5명, 경력(經歷)이 겸하는 종사관(從事官) 1명, 총관(摠官) 4명, 파총(把摠) 10명, 초관(哨官) 63명, 교련관(敎鍊官) 10명, 기패관(旗牌官) 71명, 군관(軍官) 15명이 배치되었다.

일성록(日省錄, 1868년 5월22일자)에 "사학죄인 장치선, 최영준(일명 인서)이 진무영으로 압송되어 효수(梟首, 목을 베어 매달아 둠)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진무영은 지금은 고인이 된 성지 연구가 한종오(베드로)씨가 10여년 전 문헌과 구전을 통해 성당 부근 농협 자리(현재 은혜교회 자리)를 진무영 터로 지목한 바 있다. 큰길에서 약 100m 성당 방향으로 올라오면 왼쪽에 은혜교회가 있고 이곳에 진무영 관련 건물이 있었고, 이곳에서 약 200m 더 가서 있는 강화 성당 있는 곳 까지 정도가 진무영터가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고 있다.

강화성당 구내에 이들 4명의 순교를 기념하는 현판과 아담한 제대가 마련되어 있다. 2004년부터 성지를 개발하기 시작해 아직 미흡하나 문헌 연구와 고증 작업을 하고 있다.

'좌우포청등록'과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등에 따르면 장치선은 제천 배론 신학교 집주인이던 장주기(요셉) 성인의 조카다. 그리고 최인서는 서울 아현(애오개) 회장이다. 이들은 병인박해로 성직자 12명 중 9명이 처형당하자 생존자 리델 신부를 중국 천진으로 탈출시킨 데 이어 상해에서 프랑스 신부들과 접촉했다. 리델 신부는 박해 참상을 프랑스 공사에게 알려 로즈 제독의 강화도 출병(병인양요)을 촉발한 장본인이다.

흥선대원군이 생각한 대로 천주교인들이 정말 서양배를 불러들여 국가를 위태롭게 하려 했던 것일까. 그 답은 장치선이 중국에 다녀온 직후 재동에 사는 조주서와 나눈 대화록에 있다.
"서양배가 나라를 침범할 생각은 없나요?"(조주서)
"성교의 본뜻은 다른 사람의 나라를 빼앗는 법이 없고, 만일 성교가 널리 퍼지면 풍속 중 괴상한 것은 혹 바꿔지고 고쳐지는 법은 있소."(장치선)

■ 순교자

◆ 최인서(崔仁瑞) 요한(1811 ~ 1858)
일명 영준(英俊). 경기도 용인 굴암 태생으로 7~8세 때 부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1839년경에 용인 교우 이학진(李學進)의 권유로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김씨와 혼인하여 신앙 생활을 하다가 상처 후 주 데레사와 재혼하였고. 서울 아현에 거주하며 회장직을 수행하였다 또한 선교사들은 물론 홍봉주(洪鳳周, 토마스) ?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 최형(崔炯, 베드로) 등 당시 교회의 주요 인물들과 교류하였으며. 서상기(徐尙基. 베드로) 등과 함께 수차례 변문(邊門)을 왕래하며 중국 교회와의 연락 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1866년 초 병인박해 (丙寅迫害)가 일어났으며, 10월에는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공한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발생하였다. 이때 최인서는 강화도에 정박 중인 프랑스 함대에 승선하여 리델(F.C.Ridel, 李福明) 신부를 만났고. 프랑스군이 철수할 때에는 교우들과 함에 리델 신부를 따라 중국 상해로 갔다. 1867년 4월(음)에 장치선(張致善) ? 김계쇠(金秊釗) 등과 함께 귀국한 그는 1867년 10월(음) 서울 산막리로 이사하여 쌀 장사로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1868년 4월 10일(음)에 아내 주 데레사와 함께 체포되어, 5월 22일(음) 박순집(朴順集, 베드로)의 형, 조 참봉의 부친과 함께 58세의 나이로 강화에서 순교하였다.

◆ 장치선(張致善) (1830~ 1868)
세례명은 미상, 그는 장주기(張周基, 요셉)의 조카로 5세 때 경기도 양지(陽智) 언리(彦里)에 사는 오자현(吳子賢)에게 천주교를 배워 세레를 받았다. 이때 세례명도 분명히 지었을 것이나 전해지지 않고 있디. 그는 자라서 어른이 된 뒤에 허다한 경문을 보고 외우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그가 만나보지 않은 선교사가 없었으니 페레올, 베르뇌, 다블뤼 주교. 프티니콜라, 푸르티에, 리델, 칼레, 페롱, 오메트르, 볼리외, 위앵, 브르트니에르 신부 등을 경향(京鄕) 각처에서 만나 보았다.

그는 충청도 제천에서 살고 있을 때인 1866년 봄에 베르뇌 주교가 붙잡혀 순교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4월경에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오던 길에 지자익(池子益)을 만나 그의 집으로 갔다. 이때 지자익은 박해의 사정을 중국 상해에 있던 프랑스 사람들에게 알리어 프랑스 선박을 불러다가 남은 교인들을 구제하고 나아가서는 천주교를 온 나라에 전파하고자 꾀하였다. 이러한 전후 사정을 지자익에게 자세히 들은 뒤 장치선은 그 계획이 성공할 수 있도록 연락의 책임을 맡아 적극 도왔다. 그들이 조철증(趙喆增)을 비롯한 서울 교인들이 마련해 준 돈으로 작은 배를 하나 구입하여 출항할 채비를 하고 있을 때. 중국으로 건너가 조선의 박해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배편을 알아보고 있던 리델 신부와 연락이 닿았다. 리델 신부가 제공한 돈으로 출항에 필요한 제반 장비를 갖춘 뒤 장치선은 최인서(崔仁瑞, 요한), 최선일(崔善一. 요한, 일명 智爀) 등 10명의 교우와 함께 1866년 5월 29일 충청도 신창(新昌) 용당리(龍塘里. 아산군 선장면 佳山里) 포구에서 리델 신부를 태워 중국으로 탈출시켰다.

중국에서 돌아온 장치선은 지자익을 찾아가 프랑스의 병선 몇 척이 오래지 않아 조선에 올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였다. 과연 그 소식대로 10월에 프람스 군함이 강화도를 침략하여 병인양요가 발생하였다. 프랑스 군내가 정족산성(鼎足山城) 전투에서 패배하여 퇴각하고 있을 때인 11월 12일 밤에 장치선은 송운오(宋雲五), 이성의(李聖宜), 이성집(李聖集), 박복여(朴福汝), 김계쇠(金季釗)와 함께 신창 용당리 포구에서 배를 타고 리델 신부가 승선하고 있는 프랑스 군함으로 찾아가서 진행되고 있는 박해의 상황과 페롱 신부와 칼레 신부를 증국 배에 태워 탈출시킨 소식을 전하였다. 장치선은 함께 간 교우들과 더불어 프랑스 군함을 타고 중국 상해로 가서 1년을 체류한 뒤 최인서, 김계소와 함께 1867년 8월 28일 중국 배를 타고 귀국하였다. 그들이 귀국할 때 칼레 신부가 은자 70냥을 내어 주며 돌아가서 교우들의 상황을 살펴 속히 소식을 전하면 신부 1명을 보낼 것이니 영접할 방법을 강구하라고 지시하였다.

장치선은 본국으로 돌아온 그해 12월경에 백동(栢洞, 지금의 혜화동) 양반집 행랑으로 이사하여 장사를 하면서 최인서, 김계소 등과 함께 칼레 신부기 지시한 대로 대책을 강구하다가 체포되어 1868년 4월 18일 포도청에서 두 차례 심문을 받았다. 이때 그는 모든 사실을 숨기지 않고 순순히 자백하였다. 그는 리델 신부를 탈출하게 하고 프랑스 함대를 불러들여 침락하게 하며 국내의 정세를 중국에 있던 리델 신부 등에게 긴밀히 연락하는 등의 일을 도맡아 실행한 교인이었기 때문에 연루자들이 모두 잡힐 때까지 포도청에 갇혀 있다가 7월 13일 강화도에서 최인서와 함께 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순교할 당시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우들이 어떠한 시련에서도 주님을 외면하지 않는 신앙정신을 갖도록 빌어 주소서.

[자료 : 오영환, 한국의 성지, http://paxkorea.kr ]

교통편

<승용차>
올림픽대로 개화IC(48번 국도)→김포→강화읍 (김포공항 - 강화군청 : 50km)
강화 읍내 중심부에서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400m쯤 가면 왼쪽으로 강화 성당이 있고 성당 내에 진무영 순교 성지가 마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