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갈 테면 가라지요
2011. 7. 5. 20:25ㆍ사진과 함께 좋은글과 시/좋은글과 시
(소빈이야기~닥종이인형)
세월, 갈 테면 가라지요 - 신현림
멸종된 인간은 그리움이지만
멸종된 시간은 두통이다
사라진 어제를 향해
"그래, 네 맘대로 가라"
문을 열었다 닫는 순간
팔십년대의 그림자가 피걸레처럼 뒹굴고
투사의 외로운 운동화가 쓰러진 곳에
우르르 삐삐와 쇼핑백을 든 이들이 몰려갔다
가는 곳마다 종말의 쇠사슬인 차가 밀렸다
사람들은 제멋대로 흩어졌다
어떤 친구는 따분하다며 무덤으로 갔고
나의 할아버지는
밥 한끼 먹었을 뿐인데 백년이 지났단다
기계의 나사가 빠지면 재빨리 갈아끼우듯
세대교체는 간편했다
세월은 구름처럼 단조롭고 졸립지요
영화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을 보니
노을만큼 눈이 화악 떠집디다
비디오는 이 시대의 마약입니까?
저승 가는 길에도 비디오방에 들르시오
잠옷처럼 편한 바람이 불면
그날만큼은 TV를 끄고 시를 읽어주세요
제 청춘의 바통을 받으시고
흐지부지 끝나는 인연만큼이나 슬프지만
세월, 갈 테면 가라지요
그만 커튼을 내리시고 전기불은 꺼주세요
불빛이 꺼지면 나나 당신들
아예 지구에서 사라지면 어떡하죠
빨간 잉어가 왕겨 같은 눈물을 흘립니다
세월, 갈 테면 어서 가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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