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昌慶宮) ~ 영춘헌

2011. 3. 20. 00:06서울 어디까지 가봤니?/서울 여행지

 

 

서울 종로구  와룡동 2-1 에 위치한 창경궁(昌慶宮) 은 사적  제123호로

조선시대 궁궐로 태종이 거처하던 수강궁터에 지어진 건물이다

성종 14년(1483)에 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를 위해 창경궁을 지었다.

 처음 지을 당시의 건물은 명정전·문정전의 정전과 수령전·환경전·경춘전·인양전·통명전 등의 침전 및

양화당·여휘당·사성각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궁궐중에서는 유일하게 동쪽을 향해 지어졌다.

처음에는 별로 사용되지 않다가 임진왜란 때에 경복궁·창덕궁과 함께 불에 탄 이후,

창덕궁과 같이 다시 지어져 조선왕조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숙종의 사랑을 받던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독살하려는 못된 행동을 저지르다가 처형을 당했는데,

 당시 희빈은 주로 취선당에서 생활하였다. 또한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일을 저질렀는데,

세자가 갇힌 뒤주를 궁궐 안의 선인문 안뜰에 8일간이나 두었었다.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한 후부터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09년 궁궐 안의 건물들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으며, 궁의 이름을 창경원으로 낮추기도 하였다. 그

러다가 1984년 궁궐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원래의 이름인 창경궁을 되찾게 되었고,

궐 안의 동물들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기면서 벚나무 역시 없애버렸다.

장조·정조·순조·헌종을 비롯한 많은 왕들이 태어난 궁으로,

광해군 때 다시 지어진 정문·정전들이 보존되어 있으며, 옆에 있는 창덕궁과 함께

 조선시대 궁궐의 역사를 살피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유적이다

 

 

 

 

 

 

 

 

 

 

 

 

 

 

 

영춘헌은 내전 건물이며 집복헌(集福軒)은 영춘헌의 서행각으로 초창 연대는 알 수 없다. 집복헌에서는 영조 11년(1735)에 사도세자가 태어났고 정조 14년(1790) 6월에는 순조가 태어났으며 정조는 영춘헌에서 거처하다가 재위 24년(1800) 6월 승하하였다.

순조 30년(1830) 8월 1일 오전 화재가 발생하여 환경전, 경춘전등과 함께 소실되어 순조 34년 장남궁을 헐어다 그 재목으로 재건하였다.
1983년 동물사 본관에 있던 창경원 관리 사무소가 동물사의 철거로 인하여 이곳으로 옮겨 임시 관리 사무소로 사용되다가 1986년 중건 공사 때 창경궁 관리 사무소를 신축하고 이 건물은 변형된 부분을 보수하였다.

영춘헌은 본채 5칸이 남향하여 ㅡ자형을 이루고 본채의 좌우와 뒷면으로는 행각이 둘러져 있어 ㅁ자형을 이루었으며 서쪽으로 ㅁ자형의 행각이 이어져 맞붙어 있다. 주위 건물과 비교해 볼 때 통명전, 경춘전, 환경전 등은 이익공식이고 양화당은 초익공식인 데 비하여 영춘헌은 기둥의 높이도 낮고 익공의 끝을 몰익공식으로 둥글게 굴려 초각하였으며 행각은 더욱 간결하게 굴도리집으로 처리하여 각 건물의 격을 엿볼 수 있다.

 

 

 

 

 

 

 

 

 

 

 

 

 

 

 

 

 

 

이 풍기대는 영조 8년(1732)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풍기대 위의 구멍에 깃대를 꽂고 그 깃대에 기를 달아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재던 것으로, 방향은 24방향으로 측정하였다.
전체 높이는 228.1센티미터인데, 하부대석 높이는

92.4센티미터, 상부 팔각주의 높이는 135.7센티미터이다

 

 

 

 

 

 

 

 

 

 

 

 

 

 

 

 

 

양화당의 동북쪽 구릉지 숲속에 위치하고 있다. 태실은 4각형의 지대석 위에 석종형(石鍾形)의 몸체를 놓고 8각형의 지붕돌을 얹었으며 상륜부(相輪部)는 보주로 장식하였다.

태실비는 태실 동쪽에 있는데 귀부(龜趺)와 비신(碑身), 이수를 갖추고 있고 비신 앞면에는 "성종대왕 태실"이라 새겨져 있다. 이들은 원래 조선 제9대 성종의 태를 묻은 곳인 경기도 광주군 경안면에 있었던 것인데 1928년 전국에 있는 조선 역대 임금의 태실을 대부분 서삼릉으로 이봉하면서 원래 경기도 광주군 경안면 태전리에 있던 성종태실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성종은 세조 3년(1457) 덕종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예종의 뒤를 이어 1469년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 뒤 25년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경국대전」의 반포 등 조선의 문물 제도를 완비하는 데 힘을 기울였으며 특히 창경궁을 창건한 임금이기도 하다.

 

 

 

 

 

 

 

 

 

 

 

 

팔각칠층석탑 - 보물1119호
춘당지 옆에 세운 탑이다. 일제 강점기 이왕가박물관을 만들 때

만주(滿洲)에서 가지고 온 상인으로부터 매입하여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몸돌에 “遼陽重/ 開山都/ 綱挺玉/ 巖壽塔”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으며,

“大明成化六年庚寅歲秋七月上澣吉日造”라고 기록되어 있어 1470년(성종원년)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8각의 평면 위에

 7층의 탑신을 세운 석탑으로 전체 모습은 라마탑의 형태와 비슷하다.

 

 

 

 

 

 

 

 

 

 

 

이 관천대는 소간의(小簡儀)를 설치하여 천문을 관측하던 곳으로,

「書雲觀志」에 보면 숙종 14년(1688)에 조성된 것이다.

원래 창덕궁 금마문 밖에 있던 것을 일제 때 창경궁으로 옮겨 왔다.

높이는 2.2미터, 넓이는 2.4*2.3미터이며, 주위에는 돌난간을 돌렸다.

대의 중앙에는 높이 99센티미터의 관측기를 설치하는 작은 대가 있고,

그 위에 넓이 73.4*52.6센티미터, 두께 24.5센티미터의 또하나의 판석이 있다.

 여기에 남북방향으로 관측기를 고정했던 5개의 구멍이 파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