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순례] 북암문~대각원조탑비~동북각루

2012. 3. 5. 00:23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가지정 문화재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

 

원래 수원은 지금보다 남쪽으로 약 8km 떨어진 화산아래가 그 중심이었다. 조선 정조 13년(1789)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현 위치인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그 아래에 있던 관공서와 민가들을 팔달산 아래로 집단 이전시킴으로써 현재의 수원이 형성되었다. 정조는 아버지에 대한 효심과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정조 18년(1794)에 축성공사를 시작, 2년 뒤인 1796년에 완공했다. 화성은 실학자로 불리우는 유형원과 정약용의 성설을 설계의 기본 지침으로 삼아, 영의정 채제공이 성역을 주관하고 화성유수 조심태 등이 전력하여 이룩한 것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에서 구조 배치가 가장 과학적이면서도 우아하고 장엄한 면모까지 갖추고 있다. 특히 성곽의 축조에 석재와 벽돌을 병용한 것, 화살과 창검을 방어하는 구조와 총포를 방어하는 근대적 성곽구조를 갖추고 있는 점, 용재를 규격화하여 거중기 등의 기계장치를 활용한 점 등에서 우리나라 성곽건축사상 가장 독보적인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화성」은 ’97. 12. 4. 이태리 나폴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제21차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북암문은 동북각루의 동쪽 40보 되는 벽돌로 쌓은 성 사이에 있다.
안과 밖의 홍예 역시 벽돌로 쌓았다. 안쪽은 너비가 4척 6촌

 높이가 6척 5촌이고, 바깥 쪽은 너비가 4척 높이가 6척이다.
문위에는 둥근 여장을 설치했는데 제도는 동암문과 같다.

홍예 사이에는 돌계단을 설치하여 들어가는 곳은 높고

 나오는 곳은 낮게 만들었는데, 지세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보물14호)

진각국사의 행적을 알리는 탑비로 창성사터에 있다.

직사각형의 비받침 위에 비몸돌을 세운 다음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비문을 새긴 비몸돌은 마멸이 심하고 오른쪽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으며, 지붕돌은 경사면이 완만하다.
비문에는 진각국사가 13세에 입문한 뒤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하고 부석사(浮石寺)를 중수하는 등

소백산에서 76세에 입적하기까지의 행적이 실려있다.

 입적한 다음 해인 우왕 12년(1386) 광교산 창성사 경내에 이 비가 세워졌다.
간략화된 고려 후기 석비의 형식을 보이고 있으며, 선봉사대각국사비(보물 제251호)와

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 신륵사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등과 비교할 만 하다.

 글씨는 고려 전기의 힘있는 풍모가 사라진 투박한 것으로,

고려 후기의 글씨가 퇴보하였음을 보여준다.

비문은 이색이 짓고 승려인 혜잠이 글씨를 새겼다.

 

 

 

 

 

 

 

 

 

 

 

 

동북각루는 벽성의 서북 19보 용연(龍淵)의 위에 있다.
광교산의 한 쪽 기슭이 남으로 벋어내려 선암산이 되었고, 다시 서쪽으로 감돌아 몇리를 내려가 용두(龍頭)에서 그치고서 북쪽을 향하여 활짝 열렸다. 용두란 것은 용연의 위에 불쑥 솟은 바위이다.
성이 이곳에 이르면 산과 들이 만나게 되고 물이 돌아서 아래로 흘러 대천에 이르게 되니, 여기야말로 실지로 동북 모퉁이의 요해처이다.

장안문을 잡아 당겨 화홍문과 이어지게 함으로써 앞뒤로 서로 마주 응하여 1면을 제압하고 있다. 그리고 절벽을 따라 성을 쌓고 바위에 누를 세우니 편액은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라 하였다. [전 참판 조윤형(曺允亨) 씀]
동서로 세 간인데 가운데는 온돌을 놓았고 북쪽으로 한 간을 붙이고 남쪽은 반 간(半間)을 물리었으며, 서쪽의 한 간은 또 길게 두 간을 늘리었다. 남쪽을 밖으로 물린 것은 마치 곡척(曲尺)처럼 생겨 있는데 평난간을 둘러쳤다. 그리고 위에 만(卍)자 쇄창(蔘)을 갖추었다. 온돌 4면에는 또 다시 만(卍)자 장자(障子)를 갖추었는데, 온돌의 면과 판자를 깐 면은 서로 판판하게 만들었다.

 

 

 

 

 

남쪽 동쪽 북쪽의 3모퉁이에는 5번 꺾인 팔각(八角)으로 각각 종횡의 짧은 대들보를 얹었다. 지붕 용마루의 네모진 서까래가 들쭉날쭉하여 처마를 번쩍 들고 있으며 지붕 용마루에는 망새[鷲頭]를 교착시켜 꽂았는데, 한 가운데에 3마디 절병통(節甁桶)이 까마득하게 솟아 있다.
동북쪽 평난간 밖에는 또 처마마다 판자를 깔아 성두(城頭)를 위압하고 있다. 2중으로 교란(交欄)을 설치하고 밖에는 전붕판문(戰棚板門) 16개를 설치하였는데, 만듦새는 마치 병풍을 포개어 친것 같다. 위에는 전안(箭眼) 각 1개씩을 내고, 아래에 총안 각 2개씩을 뚫었다.
단청은 5토를 사용하였으며, 대들보 위는 회를 발랐다. 내면에는 절지(折枝)를 그렸고, 정간(正間)의 조정(藻井)에는 연잎[荷葉]을 받쳤다.
동북 교란 아래의 성면 벽돌 높이 7척, 두께 4척 4촌, 위 아래에 총안 19개를 뚫고 널판지를 깔았다.
아래의 서남에도 벽돌을 돌려쌓아 담을 치고 담의 남쪽에 벽돌 홍예의 작은 문을 내었다.

 

 

 

 

 

동쪽의 물림난간 아래에도 판문을 내고 숨었던 적병의 발사에 대비하여, 포루의 제도와 같이 하였다. 정간 남쪽 처마와 층계로 누대를 만들되 돌을 깎아서 가장자리를 둘렀다. 누대의 높이 4척, 남북의 길이 13척 4촌, 동서의 너비 16척 4촌이다. 위에 방전을 깔아 우사(射)와 읍양(揖讓)의 예를 올릴 수 있을 정도의 면적을 유지시켰다. 대 위의 서북에 각각 고란층제(高欄層梯)를 놓아 정자의 위로 통하게 하였다. 대 아래의 동남 양면에도 4층 보석(步石)을 설치하고 그 남쪽 11보의 거리에 낮은 담을 쌓고 전문(箭門)을 내었다. 용연(龍淵)은 북성 밖에 있는데, 모양이 반달 처럼 생겼다. 둘레가 210보, 깊이 6척이고, 가운 데에 작은 섬이 있다.
못위 성모퉁이에 방화수류정이 있고, 정자 아래에 있는 바위는 옛날부터 용머리라 하여 낚시터로 삼을 만하다. 못의 서쪽에 석각 이두(石刻頭)를 설치하였는데, 물이 많이 차면 이 이두로 물을 화홍문 밖으로 뿜어 내게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