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공산성연지 (公州公山城蓮池)와 만하루(挽河樓)

2012. 3. 1. 06:00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가지정 문화재

 

공주공산성연지 (公州公山城蓮池)와 만하루(挽河樓)

 

공주공산성연지 (公州公山城蓮池)는 공산성 안에 있는 연못 중 하나이다.

전체적인 모습은 석축을 단이 지게 정연하게 쌓아 동서로 최대 길이 21m, 너비 12m 정도로 위를 넓게 하고, 아래는 최대 길이 9m, 너비 4m로 좁혀 쌓아 석탑을 거꾸로 세워놓은 모양을 하고있다. 서남 방향에는 잘 다듬은 돌 2매씩을 길게 쌓아 10여 개의 계단을 설치하여 출입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였다. 바닥에는 판판한 돌을 깔았고, 동·서벽쪽에는 너비 40㎝의 배수로를 설치하여 물의 흐름을 쉽게 하였다.

이 연못은 백제 때부터 계속하여 이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연못에 이를 수 있는 암문(성벽에서 잘 보이지 않는 지점을 택하여 몰래 출입하도록 만든 작은 문)이 발굴되어 산성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공산성 내 남쪽에 있는 영은사의 앞 대지(臺地)에 있다. 동서로 석축한 성곽 밖 금강변 쪽에 있으며 동서가 긴 평면 장방형이다. 규모는 최대 길이가 21㎝, 너비는 약 12㎝ 이다. 호안석축은 단을 두어 쌓았는데 전체적이 모습은 위를 넓게 하고 아래를 좁혀 쌓았다. 이는 9층 석탑을 거꾸로 세워 놓은 듯한 형태와 흡사하다. 서측호안이 남쪽에 접해서 10 여개의 계단을 설치하여 출입 통로를 두었는데 계단은 다듬은 돌 2개씩을 포개 쌓았다. 이 통로는 호안석 상계단에서 아래로 4m 되는 지점에서 북쪽으로 90˚로 한번 꺾이어 제단이 설치되어 연지의 바닥까지 출입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바닥은 판석으로 깔았고 동서 9m, 납북 4m의 규모이다. 연지의 인수구(引水口)는 특별히 시설된 것은 없는 것 같다. 연지 둘레의 동서벽에서 북쪽 금강변 호안으로 너비 40㎝의 배수로가 설치되었고 현재도 석루두(石漏頭)가 남아 있다. 이 연지의 북쪽과 금강 호안 사이의 대지에서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복원할 수 있는 정면 4개, 측면 3개의 8각 고주가 발굴되었는데, 측면 중앙에 누각으로 올라갈 수 있는 승가대석(昇架臺石)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누각 건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82∼1983까지 공주사범대학에서 발굴하여 유적지가 확인되었으며 이 연지는 백제시대부터 계속하여 이용되어 왔음을 시사하고 있다. 특히 암문(暗문)을 통해 연지에 닿을 수 있는 완전한 유적을 발굴한 것은 산성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 것이라 하겠다. 글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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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공산성연지 (公州公山城蓮池)와 만하루(挽河樓)

충청남도  기념물  제42호

 

 

 

 

 

암문

 

 

 

 

 

 

 

 

 

 

 

 

공산성 만하루 [ ] 

 

여지도서(輿)》에 따르면, 1754년(조선 영조 30) 충청감사 김시찬()이 공산성 동쪽 연못가에 6칸으로 건립하였다. 박윤원()이 지은 〈만하루기〉에 따르면, 만하루라는 명칭은 중국 시인 두보()의 시 〈세병마()〉의 마지막 구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1859년(철종 10)에 편찬된 《공산지()》와 1871년(고종 8)에 편찬된 《호서읍지(西)》에도 만하루가 언급된 것으로 미루어 그때까지는 존재하였으며,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그 이후에 홍수로 붕괴되어 매몰되었다.

1980년 공산성 내의 유적조사가 이루어지면서 만하루의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1984년 지금의 누각으로 복원되었으며, 2006년 보수공사가 이루어졌다. 지금의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건물이며, 옆에 연못도 복원되어 있다. 8각으로 다듬어진 초석()과 주위의
기단석() 디딤돌 등은 원형대로 이용하고, 건물은 당시의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보통의 누정()들이 풍류를 즐기거나 강학()을 목적으로 건립된 데 비하여 만하루는 공산성을 방비하는 군사적 기능을 중심으로 하고 경승 관람을 겸하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홍북루(유형문화재 제37호)

 

공산성의 북문으로 강남과 강북을 오가는 통로로 이용되었다.

1603년 이 자리에 있었던 망북루 터에 다시지어 공북루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아래는 성으로 통하는 위는 마루로 되어 강가의 경관을 즐길수 있게 되어 있다.

건물 안에는 시들이 걸려있고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문루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