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여행 강화성공회성당과 강화도 진무영 순교성지 (강화천주교회)

2011. 7. 1. 20:23전국 방방곡곡 여행지/경기도 여행지

 

 

궁궐 도편수가 한옥으로 구원의 방주 모양으로 지은 성전, 강화성공회성당

 

 

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1리 422 에 위치한 강화성공회성당(사적 제424호)은 

고요한 (Charies Jone Corfe) 초대주교가 1900년에 축성한 건물로

성베드로와 바우로 성당으로 명명되었다.

 

 

 

 

 

 

 

 

 

 

당시 건축공사는 궁궐 도편수가 주도하여 궁궐의 느낌과

한옥 건축물의 가치가 돋보이는 성당입니다.  

 

 

 

 

 

 

 

성당건물은 몇차례 보수를 하였으나 

처음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으며.

 성당터는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로서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배의 형상을 따랐다고 합니다. 

 

 

 

 

 

 

성당 건물은 장방형(넓이 4칸, 길이 10칸) 중층구조로

전체적인 건축양식은 한국전통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배치와 내부구조는 서양식 바실리카 건축양식을 응용하여

조화의 아름다움과 토착정신을 드러나게 하였습니다

 

 

 

 

 

 

갑곶순교성지

 

 

 

 

 

강화도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초기부터 천주교와 연관을 맺고 있다.

 

조선에 최초의 선교사로 입국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철종의 할머니 송씨와

며느리 신씨에게 각각 마리아로 세례를 준 것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왕족이었던 이들이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연유로

그동안 자식 상계군의 역모죄로 강화도에 귀향하야 살고 있던

은언군(철종의 조부)도 강화부(관청리 형방-천죽 강화성당 부근)에서 처형되었다.
  강화도가 천주교와 또 다른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839년 기해교난을 겪으면서였다.

 

 

 

 

 

박해가 시작되면서 그동안 천주교 신앙이 유입될 때 이용되던 육로 통행이 여의치 않게 되자,

적당한 해로를 찾게 되는데, 이로 인해 한강과 맞닿아 있는 강화도 연안 뱃길이 중요하게 대두되었다.

특히 김대건 신부는 선교사를 입국시키기 위한 해로를 개척하려고 서울 마포를 떠나

이곳 강화 갑곶 앞바다까지 왔으며, 그 후 연평도, 백령도를 거쳐 순위도 등산진에서

1846년에 체포된다. 그 뒤에도 이 강화 갑곶해안은 선교사들이

 해로로 입경하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통로가 되었다.

갑곶순교성지http://www.gabgot.net/

 

 

 

 

고려궁지(高麗宮址)

 

 

 

강화도의 고려궁지는 몽고의 침입 때 고려가 잠시 이곳 강화도로

도읍을 옮겼을 당시 궁궐 역할을 했던 곳이다, 이 고려궁지는

고려 고종때부터 약 40년 정도 왕궁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당시 고려는 무인정권이 들어서면서 몽고와의 화친을 거부하고

전쟁에 임했는데, 이 곳 강화도의 고려궁도 무인정권의

실력자 중 한 사람이었던 최우(崔瑀)에 의하여 세워졌다.

 

 

 

 

 

 

 

그러나 고려가 결국 몽고에 항복을 하고, 강화도의 고려궁은 몽고의 요구로 헐리게 되었다.

현재 고려궁지에는 정문 격인 승평문(昇平門)과 강화유수부(江華留守府) 건물이 남아 있는데,

이는 고려궁의 흔적들이 아니다. 이 건물들은 조선시대 강화부의 동헌(東軒)이 이 자리에

들어 서면서 만들어진 건물들인 것이다. 현재는 留守府 동헌과 이방청이 있고,

보물 제11호인 강화 동종(江華 銅鐘)만이 남아 있다. 

 

 

 

 

 

화도 진무영 순교성지 (강화천주교회)

 

 

 

 

 

진무영은 1700(숙종26)에 해상 방어를 위해 설치된 군영이며

동시에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1968년 5월 22일 최인서(崔仁瑞) 요한,장치선(張致善)

박서방,조서방등이 순교 하였다.

 

 

 

 

 

특히 최인서와 장치선은 병인박해로 성직자 12명중 9명과

신자 1,000여명이 처형되자 생존 성직자중 한분인 리넬 신부를

배로 천진으로 탈출 시키고, 서양 배를 불러다다가

신교의 자유, 남은교우들의 구출, 성교(천주교)전파, 등의 목적으로

상해까자 다녀왔다는 죄로 처형 되었는데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면서 까지, 성직자의보호,신교의자유, 그리고 복음전파의

노력하는 삶을 살다가 ,마침내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이곳 진무영 순교지엔 천주교 강화성당이 세워졌고 성지는 성당내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