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가풍을 이어온 경주 교동 최부자 집

2012. 4. 5. 06:30전국 방방곡곡 여행지/경상도 여행지

 

 

 

대한민국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가풍을 이어온 경주 교동 최부자 집

 

 

경주 최부자는 어떻게 대한민국 최고의 존경받는 부자가 되었을까. 최부잣집에는 대대로 가훈처럼 지켜온 육연(六然)과 육훈(六訓)이 있다. 자처초연(自處超然 스스로 초연하게 지낸다), 대인애연(對人靄然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한다), 무사징연(無事澄然 일이 없을 때는 맑게 지낸다), 유사감연(有事敢然 유사시에는 용감하게 대처한다), 득의담연(得意淡然 뜻을 얻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한다), 실의태연(失意泰然 실의에 빠졌을 때는 태연하게 행동한다)이 육연으로 수신(修身)의 철학이다.

육훈은 제가(齊家)의 철학으로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말라,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주변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으라는 가르침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명부(名富)의 격조와 품격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12대 만석지기의 시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전공을 세우고 전사한 정무공 최진립. 청백리로 유명한 최진립은 지극히 검소해 300년 부의 토대를 닦았다. 후손들은 최초로 관개시설을 만들어 이앙법을 도입하고 원성의 대상인 마름을 없앴다. 또 만석 이상이 수확되면 나머지를 되돌려주는 나눔의 경영철학을 실천해 소작농들이 스스로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본주의 경제를 정착시켰다.

최부잣집에서 눈길을 끄는 건물은 안채 앞 드넓은 공간에 위치한 목재 곳간. 곳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전통한옥으로 쌀 700∼800석을 보관할 수 있는 규모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 최부자는 흉년 때 이 곳간을 열어 쌀을 나눠줌으로써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해 자칫 부자로서 사기 쉬운 원성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최부잣집의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 선생에 의해 완성됐다. 일제강점기 때 백산상회를 설립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군자금을 보냈다. 최준 선생은 광복 후에는 인재양성을 위해 전 재산을 털어 대구대학(현 영남대학)과 계림학숙을 설립했다. 만약 최준 선생이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지 않고 움켜쥐고 있었다면 과연 그 재산을 온전히 지킬 수 있었을까.

 

 

 

 

 

경주교동최씨고택 (慶州 校洞 崔氏 古宅) 중요민속문화재 제27호

 

 

경주 최씨의 종가로 신라시대 '요석궁'이 있던 자리라고 전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9대째 대대로 살고 있으며 1700년경 이 가옥을 지었다고 하지만 확실한 시기는 알 수 없다.

건물 구성은 사랑채·안채·대문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대문채에는 작은 방과 큰 곳간을 마련하였다. 사랑채는 안마당 맞은편에 있었으나 별당과 함께 1970년 11월 화재로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사랑채터 뒷쪽에 있는 안채는 트인 'ㅁ'자형이나 실제로는 몸채가 'ㄷ'자형 평면을 가지고 있고 'ㄱ'자형 사랑채와 '一'자형 중문채가 어울려 있었다. 또한 안채의 서북쪽으로 별도로 마련한 가묘(家廟)가 있는데 남쪽으로 난 반듯한 길이 인상적이다. 안채 뒷편으로 꽃밭이 있어 집 구성에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양반집의 원형을 대체로 잘 보존하고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지정 당시 명칭은 경주최식씨가옥(慶州崔植氏家屋)이었으나, 경주 최씨가문이 대대로 살아왔던 집이고, 경주의 이름난 부호로 '교동 최부자 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 ‘경주교동 최씨 고택’으로 명칭을 변경(2007.1.29) 하였다.

 

 

 

 

 

 

 

 

 

 

 

 

 

 

 

 

 

 

 

 

 

 

 

 

 

 

 

 

 

 

 

 

 

 

 

 

 

 

 

 

 

 

 

 

 

 

 

 

 

 

 

 

 

 

 

 

 

 

 

 

 

 

사당

 

 

 

 

 

 

 

 

 

 

 

 

 

 

 

 

 

경주교동법주 (慶州校洞法酒) 중요무형문화재  제86-3호

 

경북 경주시 교동에 있는 최부자 집에서 대대로 빚어 온 전통있는 술이다. 경주법주를 처음 만든 사람은 최국준으로, 그는 조선 숙종(재위 1674∼1720) 때 궁중음식을 관장하는 사옹원(司饔院)의 참봉을 지냈다고 한다. 법주를 만들 때에는 최씨 집안 마당의 우물물을 쓰는데, 물의 양과 온도가 사계절 내내 거의 일정하며 옛부터 물맛이 좋기로 이름이 나 있다.

술을 빚을 때는 이 물을 일단 팔팔 끓인 다음 식혀서 사용한다. 법주의 주원료는 토종 찹쌀이고 물과 누룩과 쌀로 빚어지는 순수한 곡주로서, 색은 밝고 투명한 미황색을 띠며, 곡주 특유의 향기와 단맛, 약간의 신맛을 지니고 있다. 알코올 도수는 16∼18도이다. 제조방법의 가장 큰 특징은 밑술을 먼저 빚은 다음 이를 바탕으로 제2차 발효과정을 거쳐서 원래의 술을 숙성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제조하는데 약 100일 정도가 소요되며 온도만 주의하면 1년 이상 보관이 가능하다고 한다.

현재는 기능 보유자 최경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