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당진 신평성당

2011. 6. 23. 20:47카톨릭 이야기/천주교 성지순례

 

충남 당진 신평성당 성지

 

충남 당진시신평면 지역의 복음 전래는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두세(C. Doucet, 丁加彌) 신부가 충청도 지역의 사목을 담당하고 있던 1883년에 이미 신평면 한정리(寒井里, 또는 원머리)와 매산리(쇠터 또는 새터)에 공소가 설립되어 있었고, 1886년경 한정리 공소와 매산리 공소의 신자수는 각각 117명과 119명에 이를 정도였다. 그러므로 신평면의 복음 전래는 1883년 훨씬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 확실하다. 이들 두 공소는 1890년 양촌(陽村) 본당 설립과 함께 이 본당 소속이 되었다가 1899년에 합덕(合德, 현 구합덕) 본당 관할이 되었으며, 이후 신자수가 늘어남에 따라 금천(金川) 공소·음셈리(현 신평면 매산리) 공소·신당리(新堂里) 공소·거산리(巨山里) 공소·초대리(草垈里) 공소·운정리(雲井里) 공소로 각각 설립되어 이 공소들을 중심으로 활발한 신앙 생활이 전개되었다. 1960년 11월 신합덕 본당이 설립되자 이곳으로 소속이 바뀌었고, 1975년에 이 8개 공소가 통합되어 ‘신평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주임 이종대 신부는 원머리 공소에서 경작하던 간척지 7,636평을 매각하여 성당 건축 기금을 마련한 뒤 현 성당 부지에공사에 착수, 1976년 3월 성당(89평)과 사제관(32평)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4대 주임 윤여홍 신부는 원머리 공소 출신으로 무진년(1868년)에 순교하여 원머리에 안장되어 있던 박선진(마르코)과 박 마티아의 유해를 1989년 4월에 성당 내로 이장하였는데, 이는 대전교구 성지 보존·개발 작업의 일환으로 실시된 것이었다. 1999년 9월 기공식을 거행한 뒤 이듬해 11월 2층 성당(710평)을 신축하여 봉헌식을 가졌다. 2000년 9월에는 성당 내에 이장했던 두 순교자의 현양비를 봉헌하였다. 이처럼 신평 본당 신자들은 자신이 속한 지역의 순교자들에 대하여 강한 자부심을 느끼며 순교 신심을 본받기 위하여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신평 성당 구내에는 두분의 순교자, 박 마르코와 박 미티아의 묘가 모셔져 있다. 현 당진군 신평면 한정리 지역인 원머리, 새터, 용성이라는 곳에 병인박해시 이미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원머리에는 적어도 1850년대에 교우촌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은 염전과 논농사를 주로하며 살던 곳으로 박씨, 조씨 등이 박해 때 복음을 전파함으로서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순교자 박 마르코는 본래 원머리 사람으로 모친으로부터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의 아우 박 요셉은 1920년대에 형의 순교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르코는 모친의 뜻을 좇아 진실히 수계하면서 모친과 함께 동네 교우와 연락하고 지냈다. 신부 오시어 성사를 받으려하면 부친이 금하는 고로 이를 꺼리더니 무진년(1868년)에 수원 포교에게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본래 그의 집은 세간이 있고 본읍에 권도가 조금 있었다. 수원으로 잡혀갈 때 그는 부모게 하직하며 위로하되 '거사가서 죽으면 육정의 박절함이 없을까만은 주 명대로 위주하여 죽는 것이 구령에 편한 일이라. 부디 염려 마시고 훗날을 조심하십시오'라고 한 다음 그 사촌 마티아와 함께 수원 옥에 갇혔다. 수원에서 고문을 다할 때 마티아가 이를 못이겨 배교하려 하자 마르코는 '대주를 배반하고 영벌을 받으려 하느냐?'고 깨우치도록 하였으니, 이에 마티아는 배교함을 뉘우치고 성교함을 바로 설명하였다. 옥에 갇힌 지 15일 후 포교들은 그들을 교(絞)하여 죽였는데, 죽은 후 시체를 찾아 본 곳(원머리)에 장사하니 시체 정결함이 산이와 같았다. 이때 마르코의 나이는 33세 였고 그의 사촌 마티아의 나이는 50세 였다." 1989년 4월 4일 신평 성당 구내로 옮겨 모셨다.   (출처- http://www.paxkore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