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여행] 화성행궁

2012. 3. 4. 12:36전국 방방곡곡 여행지/경기도 여행지

 

 

[수원여행] 화성행궁

 

화성행궁은 조선 후기 정치와 군사 및 사회문화의 변화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산이며, 발굴조사 및 복원정비사업을 통해 조선시대 행궁의 모습을

재현할 수 있게 된 중요한 문화유적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또한 정조시대 실학정신을 바탕으로 위민과 개혁을 실천하고자한 역사적 공간이자
혜경궁 홍씨의 회갑진찬연을 베풀었던 효의 상징적인 공간이며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의 중심축이다.

 

 

 

 

 

 

 

장락당은 1795년 을묘원행중 혜경궁의 침전으로서 1794년(정조 18) 화성 성역 중에 완성되었으며,

봉수당 남쪽에 있는데 봉수당의 서남쪽 지붕과 겹쳐 있으며, 동향으로 세워졌다.
장락당은 전한의 도읍인 장안성의 궁전이었던 장락궁에서 이름을 따 왔다.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였던 정조는 한나라 태후의 거처였던

장락궁의 이름을 따 행궁의 내전인 장락당의 편액을 직접 써서 걸었다.
실제로 1795(정조 19) 을묘원행시에 혜경궁은 이곳에서 머물렀는데,

정민시가 지은 상량문에서는 '빛나는 궁궐이 처음 이루어지는

때를 당하여 다행히 태후께서 먼저 납시는 것을 보았네'. 라고 하였다.

 

 

 

 

 

 

 

 

 

 

 

 

 

 

 

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전란(戰亂), 휴양, 능원(陵園)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하며 그 용도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國事)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으로는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 내의 광주부행궁 등이 있고, 온양행궁은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행궁으로 조선 세종이래 역대 왕이 즐겨 찾던 곳이다.
그리고 왕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이 바로 화성행궁이라 할 수 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으며

 1790년에서 1795년(정조 14∼19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그 중에서도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단연 으뜸으로 뽑히는 대표적인 행궁이라 할 수 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부 유수(留守)가 집무하는 내아(內衙)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정조 24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陵幸)을 거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純祖) 1년(1801) 행궁 옆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 하였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화성행궁은 성곽과 더불어 단순한 건축 조형물이 아니라, 개혁적인 계몽군주 정조가

지향하던 왕권강화정책의 상징물로 정치적, 군사적인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봉수당은 화성 행궁의 정전(正殿)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한다.

1795년(정조 19)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 하였다.
이 때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였다.
이 건물은 원래 1789년(정조 13)8월 19일 상량하고 9월 25일 완공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파괴된 봉수당은 1997년 복원 되었다.
정조는 혜경궁 회갑연을 마치고 9년뒤인 1804년에 혜경궁의 70수연(壽宴)

진찬을 봉수당에서 갖겠으니 사용할 물건을 잘 보관하도록 지시하였다.
진찬례 행사는 조선시대 최대의 궁중행사로 당시의 커다란 화제거리였으며,

왕실의 종친과 신하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