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 옥파 이종일선생 생가지

2011. 6. 6. 10:59전국 방방곡곡 여행지/충청도 여행지

 

[태안여행] 옥파 이종일선생 생가지(李鍾一先生生家址)

 

 

충남 태안군  원북면 반계리 809에 위치한 이종일선생생가지(李鍾一先生生家址)는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였던 이종일(1858∼1925)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선생은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으로 박영효와 함께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오고,

광무2년(1898) 한국 최초의 한글신문을 창간하고 1908년 대한황성신문 사장에 취임하여

민중을 계몽하고 일본의 침략정책을 공격하였다. 1925년 3월에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는데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수여받았다. 1986년 생가를 복원하였다.

 

 

 

 

 

 

옥파 이종일선생의 동상과 기념관 

 

 

 

 

 

옥파 이종일선생은 16세에 문과에 급제(정3품)에 오르고

18882년 수신사 박영효와 방일사절로 도일 개화문명에 접하고 귀국 하여

동년 중추의관에 관직을 역임,1894년 보성보통학교 교장에 취임

교육사업에 전력을 다하였고 경향각지에 7개 학교장을 역임하였다.

 

 

 

 

1898년 한국 최초로 순 국문으로 된 제국신문을 창간하였으며

1908년 대한황성신문 사장에 취임 10여년동안 일제의 압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민중계몽과 개화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고 전세교민의 정신으로 언론활동을 하였다.

 

 

 

 

 

1919년 2월 오세창,권동진,최린등으로 부터 3·1운동에 대한 계획을 듣고

그 자리에서 민족대표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것을 쾌락,

독립선언서 원고를 스스로 조판,인쇄하여 국내외에 배포한후

기미년 3·1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일경에게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루다 출옥하여 "한국독립비사"를 집필하여

오세창,권동진에게 한권씩 보냈으나 일경에게 압수되었다.

선생은 오로지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온 생애를 보내다가

1925년8월31일 조국 광복응 보지 못하고 한 많은 생애를 마쳤다.

묘소는 망우리에 안장하였다가 동작동 국립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에 안장되었다.

 

 

 

 

 

옥파 이종일선생의 흉상과 생가 뒷편의 사당

 

 

 

 

 

 

 

 

 

옥파 이종일선생 생가지(李鍾一先生生家址) 뒷편에

1990년에 완공한 앞면 3칸·옆면 2칸의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옥파 이종일선생의 사적비와 생가

 

 

 

 

 

생가는 ㄴ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는 초가로 1986년 복원하였다.

남쪽으로부터 건넌방·대청·윗방·안방이 각 한 칸씩이고 부엌이 2칸이며

앞에 마루를 깔았다. 앞으로 달아낸 날개에는 북으로 문이 나 있으며

그 동쪽으로 2칸 방이 있다. 가옥의 주위는 낮은 돌담으로 둘렀다.

 

 

 

 

 

 

 

 

 

관광정보

주소~충남 태안군  원북면 반계리 809

관람료는 없고 주차가능

문의전화~041-670-2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