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여행] 달동네의 추억을 그대로 옮겨놓은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2011. 12. 19. 06:30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내 박물관

 

[인천여행] 달동네의 추억을 옮겨놓은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인천광역시 동구 송현동의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은

2005년 개관한 제1종 근현대사 전문박물관으로 1960~70년대

달동네 서민들의 생활상을 테마로 한 체험중심의 박물관입니다.

연면적 1,950.85㎡로 지하1층과 지상1층의 박물관건물이

  송현근린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는 박물관은 기성세대들에게는 향수를,

현세대들에게는 기성세대를 이해할 수 있는 교육 의 장으로 활용 될 것입니다.

수도국산달동네는 인천이 토박이인 분들에게는 정겨운 고향 같은 곳입니다.

 인천에서 3대 이상을 산 토 박이라 면 수도국산하면 달동네를 떠올릴 것입니다.

달동네는 아직도 전국의 대도시 주변에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도시산업화의 부산물이지만 특히 수도국산달동네는

 달동네 중에서도 그 유래와 역사가 깊은 곳입니다.

인천광역시 동구청은 역사의 뒤 안으로 사라지고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는

 수도국산달동네의 삶을 되살 리고자 옛 달동네 터에 박물관을 건립하였습니다.

역사 속에 실존했던 수도국산 달동네 서민의 평범한 삶 과 일상을 박물관의

주된 테마로 삼은 점은 우리나라 박물관의 역사에서도 이례적인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수도국산이란?

수도국산의의 원래 이름은 만수산(萬壽山) 또는 송림산(松林山)이다.
이 주변 일대가 매립되어 바다가 땅으로 변하고 공장이 지어지고

사람들이 몰려들기 전에는 이 자그마 한 언덕은 바닷가의 조용한 소나무 숲이었다.
송림산은 산언덕 에 소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으로 송현(松峴, 솔 고개)동,

송림(松林, 소나무 숲)동의 지명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소나무를 베어내고 언덕에 정착하여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달동네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송림산이 수도국산으로 산이름이 바뀌게 된 데에는 근대 개항 기 인천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인천은 본래 우물이 적을 뿐 아 니라 수질 또한 나빠서 개항 이후

증가한 인구와 선박으로 물 확 보가 큰 고민이었다.

일제 통감부의 강압에 의해 한국정부는 1906년 탁지부(度支部)에

수도국(水道局)을 신설하고 인천과 노 량진을 잇는 상수도 공사에 착수하였다.
‘수도국산’이라는 명칭 은 이 곳에 수돗물을 담아두는 배수지(配水池)를 설치하면서 생겼다.

 

 

 

 

 

 

송현배수지 제수변실

1908년에 제작된 송현배수지 제수변실은 원통형 콘크리트 구조로서

제수벨 브(배수관의 단수, 유압조절)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1905년 일본인이 서울 과 인천 사이의 상수도 건설계획을 추진하여 경인수도 설계를 완성했다.

이 설계도에 의하면 수원지(水源池)는 한강 연안의 노량진 일대이고 급수지역은 서울, 용산, 인천지역이었다.

 이에 따라 송현배수지는 1906년 11월에 착공하여 1908년 준공되었으며 1910년 10월에 노량진 수원지 정수시설 을 준공해

노량진~인천 사이에 32.62㎞의 수도관을 부설하고 같은 해 12월 10 일부터 급수를 시작했다.
송현배수지는 부지면적 36,780㎡이고 5,000㎥ 저수조 3개를 갖추고 있으며 현재 이곳에서

수받는 지역은 동구 일원과 중 구 일부 지역이고 저수능력은 20,000톤으로 준공 당시와 비슷하다.

 

 

 

 

 

수도국산 달동네가 생기기까지

일제강점기에 외병이 현 전동자리에 주둔 하였는데 이 때 이곳 주민들을

강제로 송현동 언덕에 주거지를 정해 주었다.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은 일본인에게
상권을 박탈당하고 중국인에게는 일자리를 잃고 인천 동구 송현동, 송림동과 같은 신설 마을로 찾아
들었다. 비탈진 소나무숲은 가난한 사람들의 보금자리로 변모하였다. 이어 한국전쟁(6.25)으로 고향
을 잃은 피난민들이 대거 몰려들었으며, 1960-70년대에는 산업화와 함께 전라, 충청지역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모여들었다. 산꼭대기까지 점차 작은 집들이 들어차면서 마침내

181,500㎡(5만5천여평) 규모의 수도국산 비탈에 3천여 가구가 모둠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결과 수도국산은 인천의 전형적인 달동네가 되었다.

 

 

 

 

 

 

달동네란?

달동네는 높은 산자락에 위치해 달이 잘 보인다는 의미로 유래는 달나라천막촌에서 비롯 되었다.

1950년대말~1960년대 중반 사이에 도 심에서 쫓겨난 판자촌 주민 들 은 정부가 정한 지역에

임시 천막을 치고 살면서 방 에 누우면 밤하늘의 달과 별이 보인다고 해서 생겨났다.
‘달동네’라는 용어가 널리 쓰인 것은 1980년 TV 일일연속극 <달동네> 방영 이후이다.

어려운 처지에서 보듬고 살아가는 달동네 사람들의 애환을 그린 이 연속극이 큰 인기를 누리면서

 이후 ‘달동네’는 불량노 후주택이 모여 있는 산동네의 대명사가 되었다.

 

 

 

 

 

 

 

달동에의 어제와 오늘

 

달동네와 같은 ‘도시 저소득층의 집단 밀집 주거지’의

시초는 일제 강점기 ‘토막민촌’이라고 할 수 있다.

토막민촌은 일제의 수탈을 피해 농촌에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올라온 이들이 주인 없는 산비탈이나 개천가에 허가 받지 않고 지은 것이다.
달동네도 그 중 한 형태인데, 일제의 식민정책, 8.15해방, 한국전쟁(6.25) 그리고 1960년대 경제개발 과정에서

인구가 급격하게 집중되고 주택이 부족하게 되자 빈민계층이 한 곳에 모여 살면서 발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달동네 주민들은 국가 소유의 땅을 무단 점거하고,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자주 철거되거나 집단 이주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도시 내에서 일자리를 얻고 살아가야 했기 때문에 도시를 떠날 수 없었다.

따라서 쫓겨나면 다시 도시의 다른 곳에서 무허가 집을 만드는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하였다.

 

 

 

 

 

 

달동네의 살림집은

달동네는 산비탈 곳곳에 우후죽순처럼 집들이 자리하면서 이루어졌다.

 좁고 비탈진 곳에 집을 짓다 보니 공간의 여유가 없는 반면 많은 기능을 담게 되었다.

더 나은 공간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궁리 하면서 자기만의 공간을 창조해 냈다.

따라서 전면적인 개축보다 낡고 오래된 부분을 개보수하거나 자투리를 활용하여 새로운 공간을 만들었다.

평면은 지형에 따라 ㅡ자, ㄱ자형을 기본으로 하는데, 증축과 개축을 하면서 조금씩 바뀐다.

수도국산 달동네 가옥 형식은 1960년대 후반까지는 목조 흙벽에 초가지붕 혹은 루핑(유지)지붕이 일반 적이었지만

 1970년대 전반 새마을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지붕은 기와지붕이나 슬레이트지붕으로 바뀌 었다.

 

 

 

 

대지이발관

박정양씨는 1957년(당시 15세)부터 수도국산 달동네 송현동 83번지에 있던 대지이발관에서 일하였다.

대지이발관은 인근에서 가장 오래된 이발관으로 한국전쟁 직후부터 있었다.

흙벽에 기와집이었으며, 약 5평 정도의 크기였다. 박정양씨는 대지이발관에서 이발 기술을 처음 배웠는데,

처음 몇 년간은 공동수도에서 물을 길어다 물을 데우고 청소를 하는 등 고된 일을 했다.

현재 강화이발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여전히 달동네 단골손님들의 머리를 단장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

 

 

 

 

 

 

달동네 모둠살이를 주제로한 전시

 

그 시절은 온 나라가 이제는 가난에서 벗어나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하고 허리띠를 졸라 매던 시절이었습니다.물질적으로 고도성장을 해온 우리 사회가 이제는 어느새 그 어려운 시절을 돌아보며 아주 먼 옛날 야야기도 아닌 가까운 과거의 이야기를 하며 추억에 젖는 것이 어느새 유행처럼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르신들은 “그래도 그때가 좋았지”하고 말씀하십니다. 어려운 시절을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는 이웃 간의 끈끈한 정이 있었고 더불어 나누던 공동체의 미덕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다시 회복하여야 할 아름다운 미덕이기도 하며, 달동네박물관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박물관을 구경하시는 관람객들은 전시를 보면서 우리가 경험한 가까운 옛날이야기를 하며 눈물짓고 그리워합니다. 30, 40대는 어린자녀와 부모님을 모시고 3대가 같이 전시를 돌아보며 자신이 몸소 경험한 과거를 떠올립니다. 어려운 시절을 부지런히 생활하시며 키워주신 부모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그동안 잊고 지낸 당시의 이웃과 친구들을 떠올리며, 우리 아이들에게 당신의 지난 생활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은 이렇게 따뜻한 감동이 있는 감성박물관으로 당신에게 기억되고 싶습니다.

 

 

 

 

달동네는 산비탈에 위치해 교통이 불편하며,

무계획적으로 집들이 들어섰으므로 골목이 좁고 불규칙했다.

좁은 땅에 여러 사람들이 살다 보니 수도나 화장실은 공동으로 사용하곤 했다.

 이른 아침마다 공동화장실에 줄을 서서 앞사람을 재촉하던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달동네는 높은 산비탈에 자리해 주변 지역을 넓게 조망할 수 있었다.

달동네 주변에는 예부터 재래시장이 성행하였고, 동네 입구에서 구멍가게,

연탄가게, 복덕방, 이발소 등의 자그마한 가게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리 모두가 경제적으로 어렵고 배고팠던 1960~70년대. 퇴근길 연탄가게에서

 새끼줄에 꿴 연탄 한 장 사고, 구멍가게에 들러

 봉지쌀 한줌 사서 그렇게 하루를 견디어갔던 달동네 사람들...

행상 나간 어머니가 물건을 다 팔고 빈 함지박으로 돌아오는 길에

 꽁치 한 마리 손에 들고 비탈길 오르는 마음도 그만큼 가벼웠을 것이다.

 

 

 

 

 

 

 

 

 

 

 

 

 

 

 

 

 

 

 

 

 

 

 

 

 

 

 

 

 

 

 

 

 

 

 

 

 

 

 

 

 

 

 

 

 

 

 

 

 

 

 

 

 

찾아가는 길

자하철

‘동인천역’에서 하차하여 ‘4번 출구’ (중앙시장,솔빛마을주공아파트)의 오른편으로 나오신 후, 다시 왼편의 ‘역전샛길’을 통과하여 나오시면 큰 길이 나오는데, 횡단보도 건너편에 ‘송현시장 입구 아치’가 보입니다.
길을 건너 송현시장 입구 아치 (제과점 뚜레쥬르와 인천종합동물병원 사이)를 통과해서 약400m 정도 오르막 길을 올라오면 '온사랑교회'를 지나 박물관에 도착합니다.

자가운전

제1경인고속도로 가좌 IC (동인천방향) ⇒ 재능대학 앞 ⇒ 송림오거리 ⇒ 박물관
‘송림오거리’에서 동인천역 방향(배다리쪽)으로 10m 지점에 박물관 이정표가 보입니다. 여기서 오른편 골목 (SK텔레콤)으로 우회하여 들어옵니다. 50m 지점에 ‘경기부동산’이 있는데 그 삼거리에서 좌회전 후 약400m정도 직진하면 오른편에 배모양의 박물관 건물이 보입니다.
제2경인고속도로 종점⇒ 동인천방향 ⇒ 배다리 삼거리 ⇒ 화도진길 ⇒ 박물관
‘배다리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화도진길’로 진입합니다. 500m 정도 직진 후 삼거리 오른편 모퉁이에 ‘송현시장 입구 아치’가 보입니다. 제과점 '뚜레쥬르'와 ‘인천종합동물병원’ 사이길로 진입하여 약400m 정도 직진하면 왼편에 박물관 건물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