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문화재탐방] 서울 효창공원 (서울 孝昌公園) 사적 제330호

2012. 1. 28. 13:00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가지정 문화재

 

[서울 문화재탐방] 서울 효창공원 (서울 孝昌公園) 사적 제330호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바친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모시는 곳이다. 원래는 효창원으로, 정조의 큰 아들인 문효세자·그의 어머니 의빈 성씨·순조의 후궁인 숙의 박씨·숙의 박씨의 자녀인 영온공주의 무덤이 있었다. 일제시대에 문효세자의 묘를 경기도 고양에 있는 서삼릉(西三陵)으로 옮기면서 효창원은 효창공원이 되었다.

광복 후에는 김구·이동녕·차이석·이봉창·윤봉길·조성환·안중근을 비롯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무덤을 모시게 되었으며, 매년 이 분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무덤지역이 넓고 소나무숲이 울창하며, 무덤 주위로 산책로가 있다.

※(효창공원 → 서울 효창공원)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효창공원(孝昌公園)은 본래 조선조(朝鮮朝) 제22대 왕 정조(正祖)의 장자(長子)로 5세에 작고(作故)한 문효세자(文孝世子)(정조6, 1782. 9 ∼동왕(同王)10, 1786. 5, 동년(同年) 윤(閏) 7월장(月葬) )의 묘소(墓所) 즉 효창원 자리인데 그 후(後)이 경내(境內)에 문효세자(文孝世子)의 생모(生母)인 의빈성씨(宜嬪成氏)(정조(正祖)10, 1786. 9월장(月葬))와 순조(純祖)의 후궁(後宮)인 숙의박씨(淑儀朴氏)(철종(哲宗)5, 1854. 7월장(月葬)) 및 숙의박씨의 소생(所生) 영온옹주(永溫翁主)(순조(純祖)29, 1829. 5월장(月葬))를 안장(安葬)한 곳이다.
원래 고양군(高陽郡)율목동(栗木洞)이었던 효창원의 경역(境域)은 지금 효창동과 청파동(靑坡洞)일대에 걸치어 심히 넓고 소나무 밤나무 등 수림(樹林)이 울창(鬱蒼)하여 매우 유수(幽邃)한 곳이었는데, 고종(高宗)31년(갑오(甲午)1984) 청일전쟁(靑日戰爭)발발(勃發)직전(直前) 우리나라에 불법(不法)으로 침공(侵攻)한 일군(日軍)의 주력부대(主力部隊)(대도혼성여단 (大島混成旅團))가 지금 효창운동장(孝昌運動場) 남단(南端)의 솔밭에 주둔(駐屯)(야영(野營))함으로부터(5월) 그 좋은 경관(景觀)이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이어 일제(日帝)가 1924년 6월에 효창원(孝昌園)의 일부(一部)를 떼어서 효창공원을 개발(開發)하고, 패망직전(敗亡直前)인 1945년 3월에는 문효세자이하(文孝世子以下)의 상기(上記) 묘소(墓所)를 모두 서삼릉(西三稜)(경기도(京畿道) 고양군(高陽郡)원당읍(元堂邑) 원당리(元堂里)) 경내로 천장(遷葬)함으로써 효창원은 사실상(事實上) 종말(終末)을 고(告)하였다.
대망(待望)의 조국광복(祖國光復)과 더불어 환국(還國)한 대한민국임시정부주석(大韓民國臨時政府主席) 김구(金九) 선생(先生)은 그 주도하(主導下)에 조국광복(祖國光復)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이봉창(李奉昌)(광무(光武)4, 1900∼1932), 윤봉길(尹奉吉)(융희(隆熙)2, 1908∼1932), 백정기(白貞基)(건양(建陽)1, 1896∼1936)의사(義士)의 유해(遺骸)를 고국(古國)땅으로 모시어 1946년 7월 효창공원의 중심지(中心地)(옛 문효세자 묘터)에 국민장(國民葬)으로 안장(安葬)함과 아울러 안중근(安重根)(고종(高宗)16, 1879∼융희(隆熙)4, 1910)의사의 허(虛)(가(假))묘(墓)를 나란히 모셨다. 이어 1948년 9월에는 중국 땅에서 순국(殉國)하신 임시정부(臨時政府) 의장(議長) 및 주석(主席) 이동녕(李東寧)(고종 6, 1869∼1940)선생과 국무원비서장(國務院秘書長) 차이석(車利錫)(고종 18, 1881∼1945)선생의 유해(遺骸)와 군무부장(軍務部長)을 역임(歷任)하고 환국후(還國後) 서거(逝去)하신 조성환(曺成煥)(고종12, 1875∼1945)선생을 공원 동남쪽 언덕에 안장하였다.
1949년 6월에는 임시정부주석 백범(白凡) 김구(金九)(고종 13, 1876∼1949)선생이 민족통일의 한(恨)을 품고 흉탄(兇彈)에 쓰러지자 국민장(國民葬)으로 공원 서북쪽 언덕에 모시어 일대(一帶)가 선열묘역(先烈墓域)으로 화(化)하였다. 그러나 특히 김구선생의 묘소(墓所)가 이곳(서울시내)에 위치하고 있음을, 그간 민족통일의 방책(方策)등에서 이견(異見)을 보이던 이승만영도하(李承晩領導下)의 당시 집권세력(執權勢力)에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기었고, 그리하여 선열묘소(先烈墓所)를 교외(郊外)로 옮기려는 움직임이 부단(不斷)하였는데, 그 일단(一端)으로 1959년, 봄부터 제 2회 아세아축구대회유치(蹴球大會誘致)를 구실(口實)로 묘소(墓所) 바로 앞에 효창운동장 개설(開設)을 추진(推進)하였다.
이에 독립투사(獨立鬪士) 심산(心山) 김창숙옹(金昌淑翁)등이 중심이 되어 「효창공원선열묘소보존회(孝昌公園先烈墓所保存會)」가 결성(結成)되고 언론사(言論社)를 비롯한 각계(各界)의 여론(輿論)이 비등(沸騰)하여 묘소이전(墓所移轉)은 보류(保留)되었지만, 효창운동장은 약 15만 그루의 나무와 숲속의 연못 및 섬까지 희생(犧牲)시키고 끝내 1960년에 개설(開設)되었다. 이러는 동안 6·25동란(動亂)으로 인(因)한 자연파손(自然破損)도 있고하여 효창공원, 특히 선열묘소(先烈墓所)일대(一帶)의 훼손(毁損)은 극(極)에 달(達)한 형편이었는데, 5·16혁명이후(革命以後) 또다시 선열묘소의 서오릉(西五陵)(경기도(京畿道) 고양군(高陽郡) 신도읍(神道邑) 용두리(龍頭里))부근(附近) 이전(移轉)이 추진(推進)되었으나 역시 유족(遺族)과 사회각층(社會各層)의 반대로 보류(保留)되었다.
이같은 경로(經路)를 거쳐 1972년 서울시에서 효창공원 조경사업(造景事業)(묘지진입로 (墓地進入路) 및 석계단설치(石階段設置), 외곽주변정비(外廓周邊整備), 수림조성(樹林造成)등)을 10개년(十個年) 계획(計劃)으로 개시(開始)하는 동시(同時)에 일반인(一般人)의 공원출입이 금지(禁止)되었으며(이는 1981년 6월 유료개방(有料開放) 때까지 계속), 1977년 7월에는 건설부(建設部)에서 효창공원으로 고시(告示)하였다.
1978년 3월에 이르러 효창공원순국선열추모위원회(孝昌公園殉國先烈追慕委員會)(발기(發起) 한국전통문화사상연구소장(韓國傳統文化思想硏究所長) 김재홍(金在鴻), 회장 곽상훈(郭尙勳))가 창립되고, 이회(會)의 주관으로 다음해부터 임시정부수립일(臨時政府樹立日)인 4월 13일을 기(期)해 7위선열합동추모제(7位先烈合同追慕祭)가 매년 거행되게 되었다. 1984년 12월에는 서울시의 협조(協助)로 각 묘소 앞의 묘표석(墓表石)을 신비(新碑)로 개수(改竪)하였다.
1988년 12월부터는 그간 사당건립(祠堂建立)등을 꾸준히 청원(請援)한 효창원순국선열추모위원회(孝昌園殉國先烈追慕委員會)의 활동과 이를 적극(積極) 수용(收容)한 국가 최고영도층(最高領導層)의 지원(支援)으로 효창공원정비공사(孝昌公園整備工事)가 정부주도하(政府主導下)에 본격적으로 추진(推進)되어 의열사(義烈祠)(사당(祠堂), 1989년 11월) 및 창열문 (彰烈門)(정문)이 건립되고 묘역확장(墓域擴張)과 정비(整備)가 대충 마무리되게 되었으며 1989년 6월에는 사적(史蹟) 제 330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효창공원에는 선열묘소 외 공원관리소, 어린이놀이터, 정구장(庭球場)등 편의시설과 북한반공투쟁사위령탑(北韓反共鬪爭士慰靈塔), 원효대사동상(元曉大師銅像), 대한노인회중앙복지회관(大韓老人會中央福祉會館)등이 자리잡고 있다. 글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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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사(義烈祠)

애국선열들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이동녕,조성환,차리석선생과

임정주석 김구선생,이봉창,윤봉길,백정기선생의 삼의사등

7인의 영정이 모셔져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60주년인

1979년 4월 13일 합동추모제전을 봉행하고

해마다 연례적으로 제전을 봉행해 오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이동녕,조성환,차리석선생의 묘

1948년 9월에는 중국 땅에서 순국한 임시정부 의장과 주석을 지낸 이동녕(李東寧)과

국무원비서장(國務院秘書長)을 지낸 차이석(車利錫)의 유해와

군무부장(軍務部長)을 역임하고 귀국 후 서거한 조성환(曺成煥)을 공원 동남쪽 언덕에 안장하였다.

 

 

 

삼의사(三義士)의 묘

광복과 더불어 환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인 백범(白凡) 김구(金九)선생이

조국 광복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백정기(白貞基) 의사(義士)의 유해와

안중근(安重根)의사의 가묘(假墓)를 1946년 7월 효창공원의 중심지에 국민장(國民葬)으로 안장하는 일을 주도적으로 처리하였다.

김구(金九)선생은3의사 묘단에 친필로 ‘遺芳百世(꽃다운 향기여 영원하라!)’라는 휘호를 남겼습니다.

 

 

안중근의사의 가묘(假墓)

의사는 세 분인데 묘소는 4기입니다.

그리고 그 중 제일 왼쪽, 즉 윗자리의 묘소에는 묘비가 없습니다.
묘비가 없는 이런 묘를 흔히 가묘(假墓), 혹은 허묘(虛墓)라고 하는데,

대개 나중에 묘를 쓰기 위해 임시로 봉분을 만들어 두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러면 이 가묘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바로 안중근 의사입니다.

백범은 3의사의 묘소를 만들면서 미처 유해를 찾지는 못했지만

언젠가는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봉환해올 것으로 믿고 가묘를 만들어 둔 것입니다.

 

 

 

 

 

 

 

 

임정주석 백범 김구선생의 묘

백범 김구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낮 1시 집무실인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피살된 후 7월 5일 온 국민의 애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거행되고 유해는 효창공원에 안장됩니다. 국립묘지가 생기기 훨씬 전 효창공원에 안장된 것입니다.
최초 효창공원에 모신 이유는 효창동이 원래 김구 선생이 살고 계셨던 곳이라서 그 곳 가까이 묘를 정하였다고 합니다. 후에 국립묘지로의 이장이 거론되기는 했으나 많은 친일파들이 묻혀 있는 곳으로는 안장할 수 없다는 가족 및 독립지사들의 반대와 숙적인 고 이승만 전대통령의 입김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이승만은 정치적 목적으로 넓은 효창공원을 축소하기 위해 공원 일부를 효창운동장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