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범개방하는 남한산성행궁 관람 (사적 제480호)

2012. 2. 1. 06:41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가지정 문화재

 

시범개방하는 남한산성행궁 관람 (사적 제480호)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 공식등재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그 어느때 보다도 중요한 시기에 남한산성 행궁복원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 2012년 1월14일부터 4월 29일까지 주말및 공휴일에 한해 해설사 안내를 통한 제한적 시범개방을 1일3회(11시,13시,15시)하고있다. 

 

남한산성행궁은 정무시설은 물론 다른 행궁에 없는 종묘사직 위패 봉안 건물을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조선시대 행궁제도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또한 역사적으로 한번도 함락되지 않은 대외 항전의 전적지로서 최고의 수준에 달하는 우리나라 성곽 축조기술을 보여주는 남한산성(사적 제57호)과 역사를 함께하고 있는 행궁은 1999년부터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상궐, 좌전이 복원되었으며, 일부 건물지에서 초대형 기와 등 다량의 유물이 출토된 중요한 유적이다.

 

남한산성행궁은 임금이 서울의 궁궐을 떠나 도성밖으로 행차하는 경우 임시로 거처하는 곳을 행궁이라 한다. 남한 산성행궁은 전쟁이나 내란 등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때까지 한양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하여 조선 인조 4년에 건립되었다. 실제로 인조 15년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47일간 항전하였다. 이후에도 숙종,영조,정조,철종,고종 등이 여주, 이천 등의 능행길에 머물러 이용하였다.

 

 

행복지수 팍팍 올려주실 꺼지요 

 

 

 

남한산성행궁

남한산성을 쌓은 이후 광주부의 고을을 산성 안으로 옮김으로써 산성의 위상은 확립되었다. 더욱이 남한산성내의 행궁은 인조 갑자년(1624년) 산성을 축성할 때 함께 지어진 것이다. 행궁은 크게 상궐과 하궐로 구성되어 있고 좌전과 우실, 재덕당, 한남루, 인화관 등 모두 70여 동에 달했다고 한다. 임금이 거처할 행궁은 상궐이 73칸(間) 반, 하궐이 154칸으로 모두 227칸의 규모이다.
행궁은 임금이 지방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거처하는 곳으로서 '행재소'라고도 한다. 남한산성의 행궁도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이나 효종의 능인 영릉(寧陵)에 참배하기 위하여 인조 2년(1624) 9월 서장대 아래쪽에 세워졌다.
상궐은 행궁의 내행전으로 정면 7칸에 측면 4칸이며 주간 거리는 중앙칸[御間] 315cm, 남퇴칸 195cm, 북퇴칸 225cm, 남북 협칸(夾間) 4칸으로 각 285cm이다. 측면인 양칸의 주간거리는 동서 퇴칸 210cm, 퇴칸 사이의 협칸 2칸은 각각 285cm이다. 초석(礎石)은 정면 북퇴칸의 안쪽 기둥의 초석을 제외한 37개다. 이들 초석은 화강암을 재료로 상면과 측면을 다듬은 것과 다듬지 않은 것들을 섞어서 사용했다. 초석 상면에 따로 주좌(柱坐)를 만들지 않았으며 건물기둥은 원형기둥을 사용하였다.
   건물 중앙의 어간대청(御間大廳)으로 사용한 공간은 초석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정면 북퇴칸 내주(內柱) 초석은 훼손되고 적심석(積心石)만 남아있다. 기단(基壇)은 건물 정면(동편)이 이중으로 되어있고, 남북 및 서편은 단일 기단이다. 건물면적은 약 97평이다. .
   온돌은 상궐 건물지내 남북 퇴칸 옆 협칸에서 각각 2개소씩 모두 4개소가 발견되었다. 이 온돌 시설들은 건물 기단토를 구축한 후 되파기하여 축조하였다. 상궐의 담장 터는 건물을 중심으로 내곽과 외곽의 이중구조로 만들어졌고 담장 폭은 1m 내외이다.
하궐은 상궐의 외전인 외행전으로서 상궐 동편 삼문 밖에 있으며 해발 369m로서 상궐지에 비해 약 6m 정도 낮은 위치에 있다. 하궐은 상궐과 함께 인조 2년(1624) 총융사 이서가 남한산성 수축과 함께 시작하여 이듬해에 준공하였다. 규모는 154칸이며, 북쪽 담의 문으로 일장각(日長閣)과 통하였고, 동쪽의 정문이 한남루이다.

 

 

 

 

행궁 부속시설

행궁의 북쪽에는 좌승당, 일장각이 있으며, 하궐에는 정조 22년(1789) 외삼문을 세우고 문루를 한남루라 하였다. 남한행궁은 임금이 행차할 때와 이와 비슷한 상황에는 임금의 거처로 사용되었으며, 평시에는 광주유수가 일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행궁 북쪽에는 숙종 37년(1711)에 좌전 26칸을 건립하여 종묘를 봉안하였다. 최근에는 좌승당, 일장각, 재덕당 등 행궁 주변에 있던 부속건물 등이 일부 복원되었다. 한편 행궁 좌측에 있는 좌전 터는 경사진 남쪽과 동쪽부분은 높이 260cm 정도로 축대를 쌓았다. 조선고적도보의 사진을 보면 외곽 담장과 외삼문 안쪽에 있었던 좌전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숙종 14년(1688)에 재덕당(在德堂)을, 숙종 37년(1711)에는 종묘(宗廟)를 봉안하기 위하여 좌전(左殿)을 세웠다. 그리고 남문 안쪽에는 사직을 모실 우실(右室) 4칸을 지어 사직을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정조 22년(1798)에는 행궁(行宮) 바깥 삼문(三門)의 상루(上樓)인 남한루(南韓樓)를 세웠고, 객관(客館)인 인화관(人和館)은 인조 2년(1624)에 세운 것인데 순조 29년(1829)에 수리되었다. 이상은 궁실(宮室)에 따른 시설들이다. 인조 2년(1624)에 목사 유림이 인화관을 지어 손님이 머무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현재 상궐의 내행전과 재덕당, 남행각과 북행각, 좌승당 그리고 종묘 좌전이 복원된 상태이다.
행궁과 더불어 많은 관아건물이 세워졌다. 관아로는 상궐 왼편에 좌승당이 있었으며 순조 17년(1817)에 유수 심상규가 좌승당(坐勝堂) 뒤편에 세운 유차산루 등이 있었다. 또 하궐 왼편의 일장각(日長閣)은 순조 29년(1829)에 유수 이지연이 세운 것이다.
   일종의 군사훈련장으로서 예전의 연무당을 숙종 때 수어사 이재명이 연병관으로 하였다가 정조 때에 '수어재영'이라 하였다. 제승헌(制勝軒)은 영조 24년(1748)에 부윤 남태온이 세운 것으로 정조 10년(1786)에 건립하였다. 이외에도 남한산성에는 수많은 관아가 있었는데, 군사기관으로는 비장청(裨將廳)교련관청(敎鍊官廳)기패관청(旗牌官廳) 등을 비롯한 20여개의 건물이 있었다. 그리고 종각(鐘閣), 마랑(馬廊), 뇌옥(牢獄 : 감옥), 성황당(城隍堂), 여단 등이 들어섰다.
   관아 건물 중 수어청(守御廳)은 남한산성을 관리하게 하였다. 수어청은 반청운동의 상징이었고, 수어사는 판서급 중신이 맡았다. 이 산성의 수비는 처음에는 총융청(摠戎廳)에서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자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다.

산성 안에는 행궁 및 관아의 소요물품인 진상과 여러 가지 관수물자를 비축하고 특히 군량을 보관하기 위하여 많은 창고를 만들었다. 『남한지』의 기록을 보면 대표적인 창고로 영고(營庫)를 위시하여 17개의 창고 시설이 있었다.
   각 창고의 기능과 역할은 실로 다양하였다. 현재 경창의 위치로 추정되는 곳은 고지도에 의하면 수어장대의 아래 우측편 능선이다. 창고의 위치에 대해서는 고지도마다 차이가 있어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남한산성지도의 영서창이나 수창일 가능성도 있다.

 

 

 

 

한남루

한남루는 정조22년(1798)에 광주 유수 홍억이 행궁 입구에 세운 2층 누문으로

기존의 외삼문과 중문만이 남아 있던 것에 추가하여 삼문삼조의 법도를 완성하였다.

 

 

 

 

 

외삼문

 

 

 

 

 

 

 

 

 

 

 

 

 

 

 

 

 

 

 

 

 

 

 

 

외행전

외행전은 하궐의 중심 건물로 규모는 내행전과 동일한 전체28칸 건물이지만

바닥 면적이 약간 작다. 평상시에는 유수의 처소로 사용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발굴 과정에서 통일신라 관련 유구들이 확인되어 건물지와 와적지를 일부 현장 보존하고 있

 

 

 

 

 

 

통일신라 건물지 발굴조사 사진

 

 

 

 

 

 

 

 

내행전

내행전은 이믐의 침전으로 규모는 정면 7칸에 측면칸으로 전체28칸 검물이다.

담으로 둘러쌓아 부속시설을 담 밖으로 설치한 폐쇄적인 구조가 특징이다.

 

 

 

 

 

 

 

 

 

일장각

일장각은 좌승당을 세우고 12년 뒤인 순조29년(1829) 유수 이지연이

정면4칸 전후 퇴칸을 둔 측면 3칸으로 전체 8칸의 규모로 건립하였다.

 

 

 

 남행각

내행전과 근접하여 남쪽에 위치한 행각으로 임금 행차시 경호원들이 기거한 건물로 생각된다.

 

 

 

 

 

 

 

 

 

좌승당

좌승당은 순조 17년(1817) 광주유수 심상규가 정면6칸,측면2.5칸의 규모로 건립하였는데

이길만한 계책이 있다면 앉아서도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좌전권역(정전,영녕전)

좌전권역은 유사시 종묘에 모셔져 있는 역대 왕의 신주를 옮겨 보관하도록 준비된 공간이다.

좌전은 행궁 창건 당시에는 없었으나 숙종 37년(1711)에 세운 것이다.

 

 

 

후원

 

 

 

 

 

 

 

 

북행각

내행전과 근접하여 북쪽에 위치한 행각으로 임금 행차시 수행원들이 기거한 건물이며

남행각 보다는 임금과 밀접한 관계자들이 머물렀던 장소로 생각된다.

 

 

 

 

 

 

통일신라 출토 대형기와

 

 

 

 

 

남한산성행궁 (사적 제480호)

경기 광주시  중부면 남한산성로 784-29, 외 일원 (산성리)

031-746-10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