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탐방/경기도] 현절사 (顯節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호

2012. 2. 2. 06:30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가지정 문화재

 

[문화재탐방/경기도] 현절사 (顯節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호


병자호란(1636) 때 3학사 윤집·홍익한·오달제의 넋을 위로하고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3학사는 적에게 항복하기를 끝까지 반대하다가 청나라에 끌려가 갖은 곤욕을 치르고 참형을 당하였다.

조선 숙종 14년(1688)에 그들이 끝까지 척화의 의리를 내세우던 곳인 남한산성 기슭에 지었으며, 숙종 19년(1693)에는 나라에서 ‘현절사’라 이름을 지어 현판을 내렸다. 우국충절을 장려할 목적으로 지었으므로 모든 경비를 나라에서 지원하였다. 숙종 37년(1711)에 김상헌과 정온을 함께 모시게 되면서 현 장소로 옮겨 지었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앞면은 제사지낼 때 활용할 수 있도록 퇴칸으로 개방하였고, 옆면은 바람막이 풍판을 달고 방화벽으로 마감하였다.

고종 8년(1871) 전국의 서원 및 사우에 대한 대대적인 철폐 때에도 제외되어 지금까지 존속되고 있다. 글출처~문화재청

 

 

 

 

 

 

 

척화삼학사(三學士)

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한 강경파의 세 학자로 척화삼학사(斥和三學士)라고도 한다. 평양 서윤(庶尹) 홍익한(洪翼漢), 교리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가 바로 이들이다.

1636년(인조 14) 청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선을 속국시하는 모욕적인 조건을 제시해오자, 윤집ㆍ오달제ㆍ홍익한은 이 사신들을 죽여 모독을 씻자고 주장하였다. 이듬해 인조가 삼전도(三田渡) 굴욕을 겪으면서 화의가 성립되자 청나라의 요구로 이들 세 사람은 봉림대군(鳳林大君)과 함께 청나라로 붙잡혀갔다.

홍익한은 1637년 2월 초 청군이 회군하는 길에 평양에서 잡혀 25일에 심양(瀋陽)에 이르렀다. 그리고 윤집ㆍ오달제는 청군의 진(陣) 뒤에 있어서 그 해 4월 15일에야 심양에 이르렀다. 19일 용골대(龍骨大)가 왕명으로 이들에게 가족과 함께 청나라에서 살기를 권유하자, 이를 완강히 거절하였다.

이에 윤집과 오달제는 서문(西門) 밖에서 처형당하였다. 홍익한은 10일에 이미 처형당했다는 설이 있고, 윤집과 오달제와 함께 처형당했다는 설도 있다. 한편, 이들이 처형을 당하기 전 청태종이 친히 국문했는데, 여기서 홍익한은 국문에 당당히 맞서 척화의 대의를 밝히고 나라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더 이상 못함을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또한, 윤집도 청태종의 회유에 완강히 거부, 몸바쳐 나라를 구하려 했던 뜻은 죽어도 떳떳하다는 기개를 보였다. 이에 태종도 이들의 기개에 오히려 감탄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들의 충의와 대절을 기리기 위해 정문(旌門)을 내렸다. 그리고 홍익한에게는 충정(忠正), 윤집에게는 충정(忠貞), 오달제에게는 충렬(忠烈)이라는 시호가 각각 내려졌다.

 

 

 

 

 삼학사(三學士)의 전기(傳記)

삼학사전 큰 이미지
송시열(宋時烈)이 편찬한 삼학사(三學士)의 전기(傳記)이다. 삼학사는 병자호란 때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다가 순절한 홍익한(洪翼漢;1609~1637) · 윤집(尹集;1606~1637) · 오달제(吳達濟;1609~1637) 등 3인을 말한다. 본문에는 이들 세 사람의 전기와 언행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들이 올린 「척화소(斥和疏)」의 주요 내용과 중국 심양(瀋陽)에서의 심문 내용도 수록하였다. 병자호란 전후 대청관계와 척화파 지식인의 동향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현절사 (顯節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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