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건축사를 장식하는 대표적 작품으로 꼽히는 건물인 공간사옥

2012. 6. 8. 09:00사진과 함께 좋은글과 시/자유게시판

 

 

 

한국 현대건축사를 장식하는 대표적 작품으로 꼽히는 건물인 공간사옥

 


주한 프랑스 대사관과 함께 한국 현대건축사를 장식하는 대표적 작품으로 꼽히는 건물은 바로 고 김수근 선생이 자신의 작업을 위해 지은 공간사옥이다. 종로구 원서도 219, 현대건설 사옥과 창덕궁 사이의 소공원 뒤에 서 있는 검은 벽돌 건물이 바로 그것이다.
이곳에는 김수근 문화재단과 공간건축사사무소, 소극장인 공간사랑, 월간지<공간>의 편집실, 화랑 등이 있다. 화랑에는 현재 서울건축학교가 임대해 들어와 있고, 예전에는 예술인들이 만남의 장소였던 커피숍은 설계실로 쓰이고 있다. 김수근 선생의 사후 공간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해 오던 장세양 소장도 작년에 타계하여, 지금 이곳을 운영하는 건축인들은 3세대가 되는 셈이다.
김중업 선생의 주한 프랑스 대사관이 전통 건축의 형태적인 아름다움을 현대건축에 되살려내고 있는 반면, 공간사옥의 뛰어난 점은 전통건축의 공간적인 특성을 성공적으로 구현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에서 현대 건축을 배우고 온 김수근 선생이 전통건축에 눈뜬 것은 최순우 선생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우리 전통건축은 내부와 외부 사이에 마루 같은 매개 공간을 두어 여유를 가지며, 공간 하나하나의 성격이 뚜렷이 구분되기 보다는 다기능적이고 연속적이다. 특히 공간과 공간 사이의 연속적인 흐름을 만들어 내는 풍경은 제각각 또다른 미적 경험을 안겨준다.
여기에 덧붙여 김수근 선생늠 자신만의 건축언어로서 주장한 '모태 공간' '제 3의 공간' '네거티비즘'등의 개념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렇게 완성된 공간사옥은 이후 공간건축사무소에서 건물을 설계하는 데 있어 하나의 모형처럼 여겨졌다고 한다.

 

 

 

 

 

 

공간사옥 건물은 한 번에 완성된 건물이 아니다. 1971년에 1차로 구관이 지어졌고, 1977년에 현재의 건물이 완성되었다. 구관은 도로 쪽과 가까운 부분으로, 구관이 지어질 당시 대지는 39.3평, 건물의 면적은 108.9평이었다. 1977년에 이웃한 대지에 신관이 바로 붙어서 증축되어 총 대지면적 약 200평, 연면적 408.4평이 되었다. 얼핏 보기에는 긴장방형 모양인데다 창이 별로 없어 폐쇄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외벽 재료로 쓰인 검은 벽돌 위로 담쟁이 덩굴이 감싸고 오른 모습은 계절마다 건물의 표정을 변화시킨다. 공간의 오섬훈 소장은 "검은 벽돌이 외벽 재료로 쓰인 것은 건축 당시 기와로 덮인 ㅁ자형 한옥 일색이었던 주변과 어느 정도 맥락을 같이 하려는 의도였다"고 설명한다.
같은 방법으로 쓰인 듯하지만 검은 벽돌은 구관에서는 조적조의 구조체이자 마감재로서, 신관에서는 철근콘크리트조 구조 위를 덮는 마감재로 그 성격이 달라진다. 외부뿐 아니라 내벽의 대부분의 공간도 이 재료로 마감되어 있다.
일본 건축가 토요이토가 "마치 미로와 같다"고 표현한 공간사옥의 내부는 외부의 절제된 형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다양함을 보여준다.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마치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듯 손발에 다가오는 공간의 적절한 크기이다. 낮지만 답답하지 않은 높이의 천장, 좁지만 불편하지 않은 계단, 예상치 못하게 나타나는 뜻밖의 공간들이 가장 알맞은 기능과 형태를 가지고 모여 있는 것이다. 특히 좁은 진입로를 따라가다 만나는 3층의 트인 공간은 상대적으로 매우 놀랍게 느껴진다. 공간 자체가 드라마틱하게 구성되야 하고 작은 공간과 큰 공간들이 적절하게 잘 섞여져야 한다는 건축가의 의도가 잘 드러난다.
그것은 평면적인 개념으로 생각해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공간의 미학이다. 건물 내부가 그토록 복잡하게 느껴지는 것은 곳곳의 계단이 서로 목적지가 다르고, 구관 쪽이 대지의 경사를 이용한 스킵 플로어(반층씩 오르내리는 구조)형식으로 지어진 영향도 크다. 그리고 당장은 쓸모없어 보이지만 마음을 윤택하고 편안하게 하는 공간들이 구석구석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건축적 의미 외에도 공간사옥이 우리 문화사에 미친 영향 또한 적지 않다. 최초의 종합예술지인 <공간>이 발행되는 이곳은 문화예술인들이 만나는 사랑방이었고, 이로 인해 건축가의 위상이 높아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만들어졌다. 현재 이 주변의 '북촌'으로 일컬어지는 가회동, 원서동 일대는 도시형 한옥의 전통을 간직해온 동네였으나 지금은 개발로 인해 제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특히 1980년대 초에 지어진 현대건설 사옥의 초스케일적인 규모는 북촌에서 비원, 동숭동까지 이어지는 문화 벨트를 이루었던 공간사옥과 상대적으로 비교되곤 한다.

 

 

 

 

 

 

최근 공간사옥은 다시 새로운 변화를 보여주었다. 1997년 11월 11일 20년만에 대지 안에 새롭게 사옥을 준공하게 된것 이다. 견고한 벽돌벽의 기존 건물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의 새 사옥은 연면적 150평 규모로, 지하 1층은 세미나실, 1층은 커피숍, 2층은 회의 및 전시실, 3층부터 5층까지는 설계실이다.
기존 건물이 작은 공간들이 높이와 크기를 달리하며 모여 있는 다양한 구성을 보여 주는 데 비해, 신축건물의 구성은 단순하다. 노출 콘크리트로 구조와 계단부 등을 처리하고 사면의 벽 전체가 유리로 마감되었다. 기존 건물에서 비원 쪽이 보이는 풍경이 일품이었음을 중시한 의도가 엿보인다.
새 사옥을 설계한 것은 고 장세양 소장으로, 그의 개념은 외부에서 보이는 형태보다는 그 공간을 창조한 정신이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다. 신축되는 새 사옥은 기존 콘텍스트와 공존하되, 시간의 축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시간이 누적된 공간, 2000년대를 지향하는 건축적 발언 등을 나타내고자 했다.
그렇게 새 사옥은 비원이 보이는 모습 그대로를 담는 건물로서, 주 공간의 형태는 단순하지만 계단부에서 재미를 느끼게 하여, 기존 건물과 형태는 달라도 공간적 흐름은 유지된다. 공간 측은 기존 건물의 구관과 신관 사이에 있던 작은 틈이 새 사옥 쪽의 브리지와 연결되어 하나의 축을 형성함을 발견하고 그 우연에 놀라워 했다고 한다. 투명한 유리 벽 안쪽에는 곳곳에 조명이 설치되어 낮의 풍경과는 또다른 밤의 풍경을 화려하게 연출한다.

 

 

 

 

 

 

 

공간사옥의 건축가

 김수근(1931~1986)세례명은 김바오로. 서울 출생

 

1950년 경기공립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건축공학과에 진학하였으나 6·25를 맞아 2년 만에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예술대학 미술학부 건축과에 입학, 신건축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재학중에는 ‘마쓰다·히라다(松田平田)건축설계사무소’에 나가 건축실무를 배우기도 하였다. 1958년 대학을 졸업한 뒤에 동경대학대학원 도시공학과의 다카야마연구실(高山英華硏究室)에서 공부하여 1960년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이어 박사과정도 수료하였다.

 

1959년 동경예술대학 건축과를 졸업한 직후 남산 <국회의사당> 현상모집에 응모하여 17점 가운데 일등으로 당선, 한국건축계에 화려하게 등장하였다(朴春嗚·康炳基·鄭炯·鄭鍾泰 합작). 1961년 김수근건축연구소를 개소하는 한편, 홍익대학 건축미술과에 전임강사로 취임하였다.

5·16 후에 <워커힐 힐탑바>에서 대담하고 상징적인 구조를 표현하여 개성 있는 작가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국내건축계는 아직 여명기의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이어 1960년대를 장식하는 <자유센터>·<오양빌딩>(1964), <정동문화방송사옥>(1965), <타워호텔>(1967), <한국일보사옥>·<홍릉과학기술연구소>(1969)를 잇달아 설계, 그의 성가를 높였다. 또한, <국립부여박물관>(1967)에서는 전통문제를 불러일으켜 건축이 사회문제의 한 장르가 되는 부수적 효과를 얻어내기도 하였다.

그의 건축활동은 1966년 월간잡지 ≪공간≫을 창간하면서 예술 전반으로 확대되었고, 불모지였던 건축언론 창달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 시기에 대표적 작품의 하나인 <공간사옥>(1977)과 <마산성당>(1979) 등을 비롯한 일련의 작품들을 설계하여 세계적인 건축가로서 부각되었고, 해외 언론매체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 뒤 그의 영역은 해외로 확대되어 일본·미국·이란·수단·인도·카타르·말레이시아에까지 작품을 세울 수 있었다. 또한, 이즈음 서울아시아경기대회와 서울올림픽대회 시설의 중요시설들도 설계하였다. 1980년대 그의 파트너십이 활성화되면서 그는 또다른 대규모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www.baumartgallery.co.kr/

 

 

 

 

 

 

 

 

 

 

 

 

 

 

 

 

 

공간사옥 옆으로는 원서공원이다.

이공원은 현대건설이 사옥건립시에 조성하여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제공하고 있다.

창덕궁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벌써 철 모르고 코스모스가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