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3. 13. 06:00ㆍ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내 박물관
인천에 우리나라 최초의 이민사박물관
한국이민사박물관은 2003년 미주 이민 100주년을 맞아
우리 선조들의 해외에서의 개척자적인 삶을 기리고 그 발자취를
후손들에게 전 하기 위해 인천광역시 시민들과 해외동포들이 함께
뜻을 모아서 건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이민사박물관입니다.
우리나라 첫 공식 이민의 출발지였던 인천에 한국 최초의
이민사박물관을 건립함으로써 100여 년의 한인 이민역사를
체계화 할 수 있는 기반이 비로소 마련되었습니다.
이민역사박물관은 앞으로 국내, 외 동포사회의 네트워크
형성을 통하여 과거 지향이 아닌 700만 동포들의 삶과 애환이
살아 숨 쉬는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장소로써 또한 국내, 외
동포 모두가 한국인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홈페이지~http://mkeh.incheon.go.kr/
이민의 출발지였던 개항 당시의 인천을 소개하고, 우리나라 첫 공식이민이 이루어지기까지의 국내정세 및 하와이 상황을 살펴 볼 수 있다. 또한 이민자들을 싣고 하와이로 떠난 첫 선박인 갤릭호 모형을 통해 당시 이민자들의 길고 험난했던 여정도 생생히 체험해 볼 수 있다.
19세기 후반 우리나라는 서구 열강의 조선 진출에 따른 이권 개입 경쟁에 의해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94), 러일전쟁(1904)에 이르기까지 많은 정치적 사건들이 사회적 혼란과 계속되는 가뭄으로 인해 혹독한 굶주림이 계속되었다. 이런 와중에 일본은 한국에서 쌀과 곡물들을 대량으로 반출해 감으로써 양곡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빈곤이라는 경제적 요인과 불안정한 정세를 벗어나려던 정치적, 사회적 요인으로 하와이로 이민을 결행하게 되었다. 당시 하와이에서는 설탕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인 노동자를 선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 과정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미국 공사이자 선교사인 알렌(H.N.Allen)의 활동이다. 그는 1884년 조선에 도착한 이후 고종 황제의 주치의로 발탁되어 황실의 신망을 얻었고, 이로 인해 조선의 정치 문제에 깊이 간여하여 양국 정부 간의 핵심적인 중재자로 큰 역할을 하였다. 알렌은 이민 관련 업무에 데쉴러를 추천하였고 데쉴러는 고종 황제로부터 하와이 이민 사업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이후 1902년 12월 22일 월요일, 하와이 첫 이민단 121명이 인천 제물포에서 일본우선회사 현해환(겐카이마루)에 승선, 일본 나가사키 항을 향해 2일간의 항해에 올랐다. 가족 친지들과 눈물의 이별을 한 이들은 12월 24일 나가사키 항에 도착하여 검역소에서 신체검사와 예방접종을 받고, 하와이로 가는 미국 태평양 횡단 기선 갤릭호(S.S Gaelic)에 탑승했다. 처음 121명이 인천 제물포를 떠났으나 일본 나가사키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19명이 탈락, 102명만이 갤릭호(S.S Gaelic)를 타고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극복과 정착
하와이에 정착한 한인들의 애환과 개척자로서 미국 전역에 뿌리를 내린 발자취 등을 담은 사진자료 및 유물을 볼 수 있다.
사탕수수농장 한인노동자들의 고된 노동생활을 담은 영상과 하와이 한인학교를 연출해 놓은 교실에서는 그 당시 사용 했던 교과서가 전시되어 있다.
하와이 첫 이민자들은 갤릭호 편으로 1903년 1월 13일 새벽 호놀룰루에 입항하였다. 그들은 검역과 입국 절차를 마치고 협궤열차에 탑승하여 오아후 섬 와이알루아(Waialua)농장 모쿨레이아(Mpkuleia)에서 본격적인 이민 생활을 시작하였다.
1905년 하와이에는 약 65개의 농장에 5,000여명의 한인 노동자들이 혼합 농장에서 다른 민족들과 더불어 생활했다. 사탕수수농장에서는 십장인‘루나’의 감시를 받았고 뜨거운 햇빛 아래서 힘든 노동도 견뎌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가장 어려웠던 것은 농장에서의 규칙적인 생활과 제도의 압박감이었다.
한 달 일을 마치면 목걸이처럼 걸고 다녔던 번호에 따라 현금으로 월급을 받았다. 1905년까지 어른 남자의 월급은 한 달에 17달러 정도였고, 여자나 소년들은 하루에 50센트를 받았다.
이당시 혼기를 훌쩍 넘긴 노총각들의 결혼 문제는 초기 이민자들의 정착을 어렵게 하는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그 당시 남성의 수가 여성보다 10배나 더 많아 배우자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던 것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한궁여지책이 사진결혼이었다. 1910년부터 1924년까지 중매쟁이를 통해 약700여 명 정도의 사진신부들이 결혼하기 위해 하와이로 건너갔다. 사진만 보고 결혼을 하다 보니 그들의 평균 나이 차이는 무려 15살이나 되었다. 이로서 본격적인 초기 한인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사진신부들 또한 개척자로서 강인하고 적극적인 삶을 꾸려나갔다.
사탕수수 농장에서의 노동
새벽 4시 30분, 기상 사이렌 소리로 하루가 시작된다.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고 향하는 사탕수수 밭. 오늘까지 자연생 잡목을 자르고 정리하는 작업을 마쳐야 한다.
하와이 말로 루나라고 부르는 독일인 십장이 나를 감독한다. 작업 중에는 허리를 펴거나 담배를 피우는 시간도 허용되지 않아 더욱 힘이 든다. 말이 통하지 않는 우리는 목걸이처럼 생긴 신분증으로 출석체크를 한다. 나의 번호는 14401번. 하루 열시간씩 엿새 동안 일하면 한달 벌이는 17달러.
낮 12시 점심시간. 하루 중, 유일한 휴식시간으로 단 30분이 주어진다. 집에서 싸온 도시락은 고향에서 먹던 맛은 아니지만 고향의 맛을 되살려 주어 주먹밥에 김치만으로도 다시 일할 힘이 난다. 오후 4시 30분. 드디어 고단한 하루 일과가 끝났다. 정리작업이 마무리되면 내일부터는 관개시설 작업을 해야 한다.
내가 지내는 곳은 한인 농장이다. 독신들은 통나무에 양철 지붕이 덮인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결혼한 부부는 작은 정원이 있는 통나무집에서 생활한다. 저녁 식사는 나무로 만든 긴 탁자와 의자가 있는 공동취사장에서 한다. 쌀밥에 국과 김치, 마른 생선, 채소, 과일로 만든 저녁 식사. 모두 함께 모여 시끌벅적한 이 시간이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농장에 처음 온 날 배급 받은 돗자리에서 잠을 잔다. 찌는 듯한 더위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어나 창밖을 보니 오늘 따라 유난히 별이 밝다. 고향의 가족과 친구들이 그립다. 이곳에서의 향수병은 다른 무엇보다 고치기 어려운 병, 하지만 이겨내야 한다. 내일을 위해 자야겠다. 참고) 하와이 이민 1세, 웨인 패터슨
또다른 삶과 구국의 염원
중남미로 떠난 한인들의 또 다른 삶과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몸을 바쳤던 선열의 활약상을 볼 수 있다. 멕시코 에네켄 농장으로 보내졌던 이민자들의 가혹한 노동환경과 쿠바, 파라과이 등 기타 남미 국가로 떠난 이민자들의 삶에 대해 알 수 있다.
1905년 새로운 삶을 찾아 1,033명의 한인들은 인천 제물포를 출발하여 이역만리 낯선 멕시코로 향했다. 하지만 이는 이민 중개인에 의한 단 한차례로 끝난 대규모의 불법 노동 이민이었다. 그들을 맞이한 것은 지상 낙원이 아니라 유카탄의 뜨거운 불볕더위와 난생 보지도 못한 에네켄 밭이었다. 에네켄 농장에서의 한인들은 1909년 5월, 4년간의 노동계약이 끝나고 해방될 수있었다. 하지만 멕시코 내란과 혁명의 와중에서 한인들의 생활은 향상되지 못하고 1921년에는 멕시코 한인 중 288명이 다시 쿠바로 재 이민을 가게 되었다
단 한차례로 끝난 멕시코 이민은 시간이 지나면서 현지인들과의 혼혈이 증가하고 한국어를 잊어 감에 따라 민족적 정체성을 점차 상실 하여 갔다.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 미주 한인은 두 가지 측면 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첫째는 외교 및 선전 활동의 전개이고, 둘째는 독립 자금의 모금이다. 그리고 미주 지역 독립운동은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 등 지도적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승만은 하와이를 근거지로 한인기독교회- 한인기독학원-대한인동지회를 통해 외교적 노력을 위주로, 안창호는 미주 본토에서 활동하며 대한인국민회를 통해 민족 교육적 입장에서, 박용만은 하와이를 근거지로 대조선국민군단과 대조선독립단을 통하여 군사적 노선의 독립운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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