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절두산 순교성지

2011. 7. 16. 10:51카톨릭 이야기/천주교 성지순례


 

 

 


김대건 신부 동상

 

 


 

 

 


 

 

 


현석문 가롤로 성인 초상  (유물 전시실)
 
 

성전건립 당시 주변경관 (유물전시실)


 


 
 

잠두봉과 절두산 사적지

 

 

현재 절두산 순교 기념관이 위치해 있는 곳은 양화나루(楊花津) 윗쪽의 '잠두봉'이다. 그 이름은 마치 누에가 머리를 들고 있는 것 같다는 데서 유래되었으며, 용두봉(龍頭峰) 또는 들머리(加乙頭)라고도 불리었다. 이곳 양화나루는 용산 쪽 노들 나루에서 시작된 아름다운 풍경이 밤섬을 돌아 누에 머리처럼 우뚝 솟은 이곳 절벽에 와 닿고, 이어 삼개 곧 마포 나루를 향해 내려가던 곳으로, '버드나무가 꽃처럼 아름답게 늘어진 곳'이었다. 특히 '양화나루에서 밟는 겨울 눈'에 대한 시는 한도십영(漢都十詠)의 하나로 손꼽힐 만큼 많은 문인과 명사들이 이러한 시를 남겼다. 이곳 잠두봉 명승지와 양화나루는 1997년 11월 11일에 사적지 제 399호로 지정되었다.

 

이처럼 아름답던 이곳이 순교자들의 피로 얼룩지게 된 것은 병인박해 때문이었다. 그 해 벽두부터 베르뇌 주교와 선교사들,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을 처형하기 시작한 흥선 대원군은 이른바 병인양요(丙寅洋擾) 직후 이곳 총융진(總戎陣)에 형장을 설치하고 신자들을 체포해 학살하기 시작하였다. 앞서 1866년 9월 26일(음력 8월 18일)에 로즈(Roze)가 이끄는 세 척의 프랑스 함대는 한강 입구를 거쳐 양화나루와 서강(西江)까지 올라갔다가 중국 체푸로 돌아갔으며, 10월에는 다시 일곱 척의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 갑곶진(甲串津)을 거쳐 강화읍을 점령하였다가 문수산성과 정족산성에서 조선군에게 패하여 중국으로 철수하였다.

 

두 차례의 병인양요가 프랑스 측의 실패로 끝나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열되어 1867년과 1868년 초까지 도처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순교하였다. 대원군은 전국에 명하여 천주교도들을 남김없이 색출해 내도록 하였으며, 11월 23일에는 성연순 등을 체포하여 강화도에서 교수형에 처하고, '천주교 신자는 먼저 처형한 뒤에 보고하라'는 선참후계(先斬後啓)의 영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함대가 양화나루까지 침입한 것은 천주교 때문이고, 조선의 강역이 서양 오랑캐들에 의해 더럽혀졌다.'는 구실 아래 '양화나루를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처음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10월 22일에 효수형을 받은 이의송(프란치스코), 김이쁜 부부와 아들 이붕익, 10월 25일에 효수형을 받은 황해도 출신의 회장 박영래(요한) 등이었다. 그리고 이후로는 효수형뿐만 아니라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기도 하였으며, 또는 몽둥이로 쳐죽이는 장살로, 얼굴에 한지를 붙이고 물을 뿌려 숨이 막혀 죽게 하는 백지사(白紙死, 일명 도모지) 등으로 계속하여 순교자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교회 안의 전승에 따르면, 순교자들의 피는 잠두봉 바위를 물들이면서 한강에 흩뿌려졌다고 한다.

 

"어떤 순교자는 죽은 뒤에도 얼굴 색이 변하지 않았고, 어느 순교자는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았으며, 또 어떤 순교자가 죽은 뒤에는 한강에서부터 무지개가 떴다.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안장한 신자는 곧 그들의 뒤를 따라 순교자가 되었으며, 이를 목격한 외교인은 무서운 박해의 위협 속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순교자들의 씨는 복음의 터전이 되었고, 복음에 대한 믿음은 다시 순교자를 탄생시킨 것이다."(한국의 여러 '순교사기')

 

이 때부터 이곳은 양화나루나 잠두봉 등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려질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불려진 이름이 절두산(切頭山),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얼룩진 탓에 애닯은 의미가 더 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순교자들의 행렬은 이후로도 3-4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면서 절두산은 이제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사 100년을 대변해 주는 곳으로 인식되었다. 이에 교회측에서는 순교자 현양 운동의 일환으로 1956년 5월 20일에 이 일대를 매입하였고, 6년 뒤에는 순교자 기념탑과 노천 제대를, 1967년에는 순교 기념 성당과 박물관을 건립하였다. 뿐만 아니라 명동 대성당 등 여러 곳에 안장되어 있는 순교 복자들의 유해를 옮겨다 안치하였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절두산이란 이름은 그렇게 순교자들의 혼과 넋을 담은 곳으로 우리에게 남겨지게 되었다. 또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며, 순교자 현양 대화도 자주 열리는 곳이 되었다. 실제로 이곳에 있는 공경하올 순교자들의 유해, 한국 성인들이 남긴 유품과 유물 등은 복음의 가르침과 함께 다음 세대로 이어지게 될 것이고, 우리 신앙 후손들이나 그 자손들 또한 이를 통해 내면의 양식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럴수록 우리는 100여 년 전에 이곳에서 일상의 영욕을 버린 채 천국이라는 영원한 본향(本鄕)을 찾아간 그들의 신앙을 되새겨 보아야만 한다.

 

 

 

<차기진, 사목 242호(1999년 3월), pp.95-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