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한 바다 / 도종환
2005. 9. 16. 00:02ㆍ사진과 함께 좋은글과 시/좋은글과 시
신진도항
젊은 날 내가 좋아한 바다는
바람이 차고 쓸쓸한 겨울바다였다
어촌 사람들의 가난한 흔적만 남고
어지러운 발자국들은 말끔히 씻겨나간
작고 조용한 바다였다
해송을 끼고 활처럼 굽은 해안선 허리를 따라
걸어갔다 오는 동안 육신과 마음이 고요해지고
몇 마리 마른 물고기가 널려 있는 집 곁을 지나거나
뱃전에 가만히 흔들리며 앉아 있는 동안
마음이 편안해지는 바다였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크고 억센 바다와 만났다
함께 간 사람들은 싸워 이겨야 할 바다라고 말했다
배를 몰고 멀리까지 나가 파도와 맞서기도 하고
만선의 깃발을 나부끼거나 그물까지 잃어버리고
빈 배로 떠도는 일을 되풀이하기도 했다
그것이 훌륭한 선장이 되는 길이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이제 배를 다루는 기술은 늘었지만
바다는 감당하기 어려운 때가 더 많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바다를 찾아 나서지만
오늘도 나는 바다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온다
옛날 그 자리에는 없어도 어딘가에 있을
바다를 만나려면 바다에 맞서려 하지 말고
먼저 바다를 좋아해야 하는데
바다를 이기려고만 하지 말고 하나되려고 해야 하는데
내가 먼저 작고 조용해져야 하는데
내가 좋아한 바다 / 도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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