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종로구 평화시장과 전태일 [全泰壹, 1948.8.26~1970.11.13]

2008. 11. 30. 19:01사진과 함께 좋은글과 시/자유게시판

 청계천 6가의 <버들다리> 위에 전태일 全泰壹 반신 부조상

 

 

 

 

전태일 [全泰壹, 1948.8.26~1970.11.13]

젊은 나이에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의 의류제조 회사에 입사하여 근무하다가 근로환경 개선을 위해 투쟁하였으나,

사회의 무반응과 개혁의 불가함을 느껴 의분 분신자살한 노동운동가.

 

 

 

전태일()은 대구에서 태어났으나 서울로 옮겨와 생활이 어려워 겨우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17세 때 평화시장의 의류제조 회사의 재단사로 입사하였다. 당시 한국의 중소 기업은 노동집약적인 섬유, 봉제, 가발 산업이 성하던 시대였다. 청계천변에 자리 잡은 평화시장 역시 소상인과 소규모의 기업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그가 근무하던 봉제공장은 그런대로 규모가 있는 회사였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는 나이 어린 노동자들을 값싸게 채용하여 수익을 올리는 사례가 많았고, 정부의 근로기준법이 있었으나 이를 어겨가며 이익을 추구하는 회사가 많았다.
 
전태일은 직원이 2만여 명이나 되는 봉제공장의 재단사로 일하면서, 주변에서 나이어린 소녀들이 열악한 환경속에서 중노동에 박봉의 생활을 하는 것을 목격하고 의분을 느꼈다. 그는 동료 재단사들과 '바보회'를 만들어 평화시장의
노동조건 실태를 조사하기도 하였다. 그는 '근로기준법()'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내용을 공부하였으나 한자가 많아 내용을 알 수 없어 '대학을 나왔더라면 알 수 있었을텐데.....'라고 하며 한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근무하는 회사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해야 하는 회사에 해당되나 이를 지키지 않고 있음을 알고 요로에 진정을 하였다.
노동환경 조사 결과를 토대로 노동청서울특별시에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하였지만 번번히 묵살당하였다. 시청 근로감독관에게 감독을 요청하였으나 허사였다.
 
그가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에서 근로 환경을 고발한 내용에 의하면, 2만 명이 넘는 직원의 90% 이상인 봉제공의 평균 나이가 18세이며 하루 근무시간은 15시간이고, 시다공의
평균 연령은 15세이며 하루 16시간을 일한다고 적고 있다. 그는 자신의 불행보다는 공장 내 나이 어린 여공들의 생활 환경에 더욱 동정심이 갔고, 이의 해결을 위한 의분()이 발동했다.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에서 나이 어린 소녀들이 안질, 신경통, 위장병, 폐결핵 등에 고생하고 있으며, 성장기에 한 번 고생하면 평생 고칠 수 없게 된다고 하소연하며 근로환경을 개선해줄 것을 애절하게 호소하였다.
 
그가 고발한 열악한 근로환경과 개선 요구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나이 어린 소녀들을 고용 착취
-
근로 시간 어김(성인 공무원 주당 45시간인데 반해 15세 시다공의 주당 근로시간 98시간)
- 하루 종일 햇볕을 보지 못하고 환기되지 않는 공기로 안질, 폐결핵 등에 걸림
- 한 달 휴무일 격주제 2일
- 건강검진 형식적 (필름 없이 X레이 촬영)
 

<개선 요구 내용>
- 하루 근무시간 10~12시간으로 단축
- 1개월 휴일 2일을 매 일요일(4일)로 연장
- 건강검진은 정확하게 할 것
- 시다공 임금 하루 70 ~ 100원에서 50% 인상해줄 것 등
 

모든 것이 요구대로 개선되지 않자, '삼동친목회'를 조직하고 근로조건개선 시위를 도모하였다. 그리고 한국의 근로기준법이 있으나 형식적이며,
감독관청도 전혀 이를 지키려 하지 않자, 더욱 비애를 느끼고 죽음을 택하였다. 그는 정의심이 불타는 22세의 젊은 나이에 사회의 비정함과 무관심 미래가 없는 삶에 대한 회의를 느끼며, 이 사회에서 형식에 불과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갖고 자신도 그 불에 함께 타들어가 생을 마감하였다.(1970. 11. 13)
 
그의 죽음은 당시 산업사회로의 도약과 민주사회로의 변화를 추구하는 우리 사회의 열망과 맞물려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고, 특히 무반응으로 일관하던 당시의 정부와 기업인 그리고 관료들에게 무거운 경각심을 주었다. 또한 1970년대 이후의
노동운동에 발화의 역할을 하여 한국 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그었다. 그 후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전태일 평전》이 저술되었고,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제작되었다. 최근에는 그가 분신한 곳을 기념하고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청계천 6가의 <버들다리> 위에 반신 부조상을 설치하였다(2005. 9. 30).

 

글출처 : 네이버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