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구 방배동 도구머리길~이수역 사거리

2010. 2. 14. 12:43서울 어디까지 가봤니?/서울 걷기 좋은길

서초구 방배동 도구머리길~이수역 사거리

 

 

 

 

 

 

 

 

 

 

 

 

 

 

 

 

 

 

 

 

 

 

 

 

 

 

 

 

 

 

 

 

 

 

 

 

 

 

 

 

 

 

 

 

 

 

 

 

우리가 살던 집


하루는 내과 회진을 돌다가 지인의 아내가 입원한 병실에 들렀다. 환자는 팔에 링거를 꽂은 채 누워 있고, 김 사장은 보호자 침대에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이리 앉으이소. 저 사람, 통증이 곧 가라앉을 겁니더.” 그는 피로가 쌓인 얼굴로 의자를 내밀었다.

어제저녁 우리는 병원 근처에서 한잔했다. 그는 울적한 마음을 풀고 병에 대해서도 더 알고 싶은지 밖에 나가자고 했다. “암 아니겠죠? 내가 사업한다고 술이나 마시고 다녀 마음고생깨나 했을 건데...” 그는 자기의 무관심이 아내의 자궁에 근종을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울먹였다.

내가 병실에 들어온 줄도 모르고 창밖을 바라보던 그의 큰딸이 고개를 돌려 목례했다. 엄마 곁에서 한숨도 못 잤는지 눈이 충혈되었다. 아니, 밤새 울었는지도 모른다. 엄마 몸에 칼을 댄 사실이 분하고, 여성의 상징인 자궁을 들어낸 것이 허망할 것이다. 뾰로통한 눈빛엔 아빠에 대한 원망도 서린 듯했다. 그때 벽을 향해 누운 환자가 겨우 몸을 돌리더니 “걱정하지 마세요. 암이 아니라니 다행이죠, 뭐.”라며 짐짓 밝은 웃음을 지었다. 그 배려에 병문안 온 내가 되레 어색해졌다.

엄마의 긍정적인 마음에 딸이 동조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딸이 갑자기 “아빠.”하며 무거운 분위기를 깼다. “엄마한테서 떼어 낸 거, 우리가 살던 집이에요. 이제 엄마한테 잘해 주세요.” 순간 그는 눈물을 글썽였다. 사업한답시고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죄책감이 딸의 한마디에 쏟아진 것이다.

아들이라면 감히 생각지도 못했을, 어른조차 상상할 수 없는 그녀의 말이 병실을 울리며 맴돌았다. 자궁, 두 남매가 태어나고 살아온 집, 궁전보다 편하고 귀한 집을 잃은 딸의 슬픔이 엄마의 그것에 뒤지지 않을 터.

스물네댓 살 된 딸의 말을 듣자 내 가슴속에서도 울컥 치솟는 게 있었다. ‘내가 살던 집은?’ 복도를 걸으며 자문해 보았다. 팔 남매를 낳아 기르고 이제 아흔이 넘은 어머니를 뵌 지도 오래됐구나. 집을 잃은 슬픔을 듣고서야 고향 집을 떠올렸으니 정년을 지난 나이에 자괴심마저 들었다. 홀로 계신 방에 이른 봄 냉기나 돌지 않는지 모르겠다. 전화드려야겠다.
(이방헌, ‘좋은생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