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구 가리봉동 연변거리 [조선족거리]

2010. 2. 21. 09:07서울 어디까지 가봤니?/서울거리 오래된 골목길

 

구로구 가리봉동 연변거리 [조선족거리]

 

 

 

 

 

 

 

 

 

 

 

 

 

 

 

 

 

 

 

 

 

 

 

 

 

 

 

 

 

 

 

 

 

 

 

 

 

 

 

 

 

 

 

 

 

 

 

 

 

 

 

 

 

 

 

 

 

 

 

 

 

 

 

 

 

 

 

 

 

 

 

 

 

 

 

 

 

 

 

 

-윤미경-


   한창 젊은 나이에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정체성 혼란으로 오랜 시간 정신적으로 방황하며 살았다. 정체성의 부재이니 사는 의미도 모르겠고 기쁨도 즐거움도 없었다. ‘이렇게 사느니 그냥 죽어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느님 나라에 가면 평화와 안식을 누린다니 그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살아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죽어버려야겠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면서 그 문턱 앞에서 서성거리기를 마흔이 다 되도록 했다.

‘나’를 모르는 방황의 시간 동안 답답한 마음에 점집도 가 보았고, 평일미사 참례와 봉사활동을 하면 은혜를 받는다는 말에 이곳저곳 미친 듯이 봉사활동도 다녔다. 한동안은 수도자·성직자에게 정성을 들이면 은혜 받는다는 말에 솔깃하여 마냥 그분들을 따라다닌 적도 있었다. 다른 사람의 반응과 말에 좌지우지되면서 살다 보니 점점 사람들이 싫어지고 적대감만 생겨 종내에는 사람들을 피하며 살았다. 깊은 혼돈의 시간이었다.
그 고통스럽던 혼돈의 시간 끝에서 ‘나’와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나의 생각·욕구·감정을 살피고 공감하면서 비로소 ‘나’라는 존재에 대해 애정을 갖게 되었고, 타인에게 향해 있던 에너지를 내 안으로 향하고 내 안에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나의 삶은 달라졌다. 물론 외적인 조건은 바뀐 것이 하나도 없다. 다만 내 마음이 바뀌다 보니 그저 기쁘고 행복이 샘솟듯 넘친다. 하느님께서 순간순간의 삶을 당신의 지혜로 채워주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어제도 오늘도 나와 함께하시는데 이를 모른 채 다른 사람과 다른 세상에서 하느님을 찾아 헤매며 살았으니 참으로 어리석었다. 그 세월 동안 마음 아프셨을 하느님을 생각하니 송구할 따름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있듯이 우리는 정녕 가장 가까운 곳에 가장 소중한 것이 있음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 같다. 가까운 보물을 알아내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나’는 ‘있음’ 그 자체로 행복한 사람이다. 나는 오늘도 우리 모두가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오늘날 권위가 존중받지 못하는 사태를 많이 경험한다.
가정에서는 가장의 권위가 추락하는 경우가 엄청 발생하게 되고
부모가 늙으면 부모의 권위가 공경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학교에서 스승의 권위가 추락된 것도 이미 오래전 일이고
이제 성역이라 하였던 대통령의 권위도,
성직자의 권위마저도 서서히 추락하는 경우들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오늘은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기초로 교회를 세우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우리 가톨릭 교회는 이 때문에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 성하에 대한 절대 공경을 표해 왔고, 
이는 주교들과 사제들에게까지 확장 적용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권위에 대한 맹종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또 잘못된 권위의 행사는 지탄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올바른 권위에 대한 불순종은 자기 욕심과 이기심의 산물일 뿐이다.
참된 권위에 대한 순종과 공경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질서를 보여주는 지표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잘못된 권위와 올바른 권위의 차이점은 어디에 있는 걸까?
베드로의 사례를 통해 그 답을 찾아보자.

먼저 잘못된 권위는 그 권위가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많은 정치가들의 권위에 맹종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릇된 교주들의 권위에 맹종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참된 권위는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일 뿐이다.
베드로의 권위는 자신에게서, 자신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기에 참된 권위일 수 있는 것이다.

두번째로
잘못된 권위는 속임수와 술수를 통해서 얻게 된 권위이고
참된 권위는 진솔한 신뢰와 확신을 통해 얻게 된 권위이다.
일부 정치가들과 사이비 교주들은 대부분 전자의 길을 통해서 권력을 움켜 쥐게 되고
베드로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확신을 고백함으로써 권위를 부여받게 된다.

세번째로
잘못된 권위는 자신의 권력을 누리는데 급급하고 더 누리지 못해 안달하고 고민한다.
하지만 참된 권위는 더 잘 봉사하지 못함에 늘 가슴아파하고 그래서 늘 하루 빨리
그 봉사의 직책에서 물러나게 해달라고 고뇌한다.

내가 만나뵌 교황성하와
내가 모셔본 총장님, 관구장님들과 원장님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이러한 참된 권위의 소유자들이셨다.
그래서 진정으로 공경을 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분들의 봉사에 대한 참된 고뇌와 아픔을
늘 옆에서 지켜보면서
과연 하느님께서 뽑으신 분들이구나 하는 것을 깊이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렇게 훌륭한 사표들을 보내 주시어
당신의 권위를 대신 전해 주심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요즈음
퇴임 앞둔 대통령에 대해서나
교회 일각에서 제기되는 성직자들에 대한 비난과 비판들을 보면서
참으로 가슴 아플 때가 많다.
물론 인간적인 관점에서 대통령이든 성직자들이
그 누구의 비난도 받지 않을 정도로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는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었으면 하는 
희망사항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부모님들이 인간적으로 약점과 부족함이 없기 때문에 
공경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선생님들은 바로 우리의 자식들 중에서 나오고, 
우리 형제 중에서 나오는데
인간적인 관점에서야 별별 약점과 부족함을 다 안고 있는 그들이 아닌가?
교황님마저도 인간적인 관점에서야 약점이 없겠는가?
성인들마저도 인간적인 약점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었단 말인가?

참된 권위는 인간적인 약점과 한계와는 별로 관계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런점에서 가장 약점이 적은 제자에게 하느님 나라를 맡긴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가장 약점이 많을지도 모를 베드로 사도에게
그 열쇠를 맡겼음을 다시 한번 생각할 때다.

베드로 사도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예수님께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와 확신이었다.
그리고 그분을 누구보다도 사랑하였다는 것이었다.

우리 교황님도 주교님도
본당신부님도
나는 그러리라 믿는다.
우리 총장님도 우리 관구장님도 우리 원장님도
나는 그러리라 확신한다.
그러기에 그분들에게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공경을 드리고 싶다.
늘 부족하지만 말이다.
어머니께 최선을 다해 공경지례를 못드리듯이...

오늘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맞이하여
특별히 우리의 장상으로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분들에게 
우리의 참 공경을 드리자.

나의 부모님, 장인 장모님,
나의 선생님, 나의 은사님,
우리 신부님, 수녀님,
우리 주교님, 교황님,
우리 관구장님, 원장님,...

더 감사드리지 못해서 늘 죄송합니다.
오늘 만큼은 그 봉사의 직무에 너무 짓눌리지 마시고 행복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