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여행, 영동군 황간면 우매리 반야사 [般若寺]

2010. 3. 1. 01:02전국 절집이야기/사찰(寺刹) 이야기

 

 

충북여행, 영동군 황간면 우매리 반야사 [般若寺]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인 반야사는 720년(신라 성덕왕 19년) 의상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인 상원(相源) 스님이 창건한 절로서 이절 주위에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신앙에 기인하여 반야사라 하였다고 하며 수차례의 중수를 거쳐서 1464년(조선 세조 10년)에는 이 절의 승려들이 세조의 허락을 얻어 크게 중창을 했는데,  세조는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에 들러 9일 동안의 법회를 끝낸 뒤, 혜각 신미(慧覺 神眉) 스님 등의 청으로 이 절의 중창된 모습을 살피고 대웅전에 참배했다. 그 뒤에 자세한 연혁은 전해지지 않지만 다음의 몇 가지 설화는 천년 고찰의 역사를 대신 말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세조가 복천사 법회를 마친 뒤 이 절에 들러 대웅전에 참배 했을 때 문수동자가 나타나 세조에게 따라오라고 하면서 절 뒤쪽 계곡인 망경대(望景臺)의 영천(靈泉)으로 인도하여 목욕할 것을 권했다.
동자는 ‘왕이 불심이 갸륵하여 부처님의 자비가 따른다’ 는 말을 남기고 사자를 타고 사라졌는데 목욕을 마친 후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에 세조는 황홀한 기분으로 절에 들어와서 어필(御筆)을 하사했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보관되어 있다.


고려 충숙왕 때에 글재주가 좋기로 소문난 18세의 황도령이 황간 동헌에서 열린 백일장에 참석하게 됐다. 그런데 물‘수’자와 산‘뫼’자를 몰라 낙방하고 말았다.
이에 크게 상심한 황도령은 그 길로 황간 반야사를 찾았다.
그는 이곳에서 학식이 뛰어나기로 소문난 일우스님께 학문을 배우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우스님이 가만히 보니 황도령 얼굴색이 점점 나빠지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황도령이 한 처녀귀신에게 씌인 것이었다.
이에 일우스님은 황도령 전신에 금강경 5,149자를 빽빽이 써넣고 옷을 입혔는데 그날 밤 황도령을 찾아온 처녀귀신이 그 금강경의 힘에 눌려 괴로워하다가 황도령의 귀를 물어뜯고 도망쳤다. 그만 일우스님이 금강경을 쓸 때 황도령의 귀부분만 빼먹은 것이다.
그러나 황도령은 금강경 덕분에 살아났고 그 인연으로 출가했는데, 귀가 없다하여 ‘무이법사(無耳法師)’ 라고 불렸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 불교가 탄압을 당할 때 벽계정심 선사는 머리를 기르고 속인 같이 지내기 위해서 과부를 얻어 사는데 부인은 1년을 살아도 과부요, 2년 3년을 살아도 이름만 영감이지 언제나 남남이었다.
그래서 하루는
“스님, 저는 갈랍니다.”
“왜?”
“이름만 영감이지 저는 항상 과부 신세를 면치 못하니 이래서는 더 이상 못 살겠소.”
“그러면 할 수 없지. 그러나 3년 동안 밥해 주느라 수고를 많이 했는데, 그 동안 수고한 수고비로 이것이나 받으시오.”
하면서 은으로 만든 표주박을 내어준다.
부인은 그것을 받아 가지고 나오다가 동구 밖 샘물가에 앉아서 표주박으로 물 한 모금 떠서 마시고 팔자 한탄만 하다가 표주박도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만 놓아둔 채 3년 동안 영감을 얻으려고 이리저리 돌아다녔으나 아무도 살자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하루는 생각해 보니 어차피 과부 신세 면할 길 없으니 다시 정심선사를 찾아가면 이름이라도 영감이니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그 길로 선사를 찾아뵙고 인사를 올렸더니
“내 다시 올 줄 알았소.” 한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 이유를 알고 싶소. 그러면 3년 전에 내가 준 표주박은 어찌 했소?”
하고 물으니 부인은 솔직하게 다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 자리에 가서 보시오. 아직도 그대로 있을 것이요.”
“어째서요?”
“내가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중이 되기를 5백번이나 하였는데 처음 중이 되면서 지금까지 남이 주지 않는 것은 가져본 일이 없었소. 그래서 그인덕으로 무엇이든 내 것이라 이름만 지어놓으면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이요.” 그러나 부인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밑져봐야 본전이니 속는 셈 친다고 생각하면서 가서 보았더니 과연 3년 전에 자기가 버린 그 모습 그대로 있는 것이다.
이것을 본 부인은 인과법칙의 이치는 털끝만큼도 어김이 없음을 확연히 깨닫고 다시는 다른 마음을 먹지 않고 죽을 때까지 잘 받들어 모셨다고 한다.


반야사 경내 극락전 앞에 있는 배롱나무는 조선 건국 당시 무학대사가 주장자를 꽂아 둔 것이 둘로 쪼개져서 쌍배롱나무로 생겨났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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