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곶순교성지 (강화도)

2011. 6. 15. 07:38카톨릭 이야기/천주교 성지순례

갑곶순교성지 (강화도)

 

 강화도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초기부터 천주교와 연관을 맺고 있다. 조선에 최초의 선교사로 입국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철종의 할머니 송씨와 며느리 신씨에게 각각 마리아로 세례를 준 것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왕족이었던 이들이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연유로 그동안 자식 상계군의 역모죄로 강화도에 귀향하야 살고 있던 은언군(철종의 조부)도 강화부(관청리 형방-천죽 강화성당 부근)에서 처형되었다.


  강화도가 천주교와 또 다른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839년 기해교난을 겪으면서였다. 박해가 시작되면서 그동안 천주교 신앙이 유입될 때 이용되던 육로 통행이 여의치 않게 되자, 적당한 해로를 찾게 되는데, 이로 인해 한강과 맞닿아 있는 강화도 연안 뱃길이 중요하게 대두되었다. 특히 김대건 신부는 선교사를 입국시키기 위한 해로를 개척하려고 서울 마포를 떠나 이곳 강화 갑곶 앞바다까지 왔으며, 그 후 연평도, 백령도를 거쳐 순위도 등산진에서 1846년에 체포된다. 그 뒤에도 이 강화 갑곶해안은 선교사들이 해로로 입경하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통로가 되었다.


  1866년부터 시작된 병인박해 때는 강화도가 혼란의 중심에 서게 된다. 대원군은 천주교 금지령을 내려 몇 개월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천주교인 수 천명을 학살하는 사건을 일으키는데, 이로 인해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하게 된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순교하였는데, 이곳 강화도에서는 1868년에 진무영(현재 강화성당 부근)에서 최인서, 장치선, 박서방(박순집의 형), 조서방 등이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1871년에 이곳 갑곶에서 직접적인 순교사건이 일어났다. 강화도 해역에 미국함대 4척이 나타나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불탄 사건의 책임을 물어 통상을 요구했으나, 대원군이 이를 거절하게 되면서 군사적 충돌이 빚어진 것이다(신미양요). 이 사건으로 대원군은 천주교를 박해하였다. 그 결과 기록상 제물진두(현재 화수동성당 주변)에서 여섯 분이, 이곳 갑곶진두에서는 세 분이 순교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갑곶에서 순교하신 분은 박상손(朴常孫),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세 분이다. 사연인 즉, 미국 군함이 물러간 이후, 같은 해 5월 29일(양력(7월 16일) 고종은 더욱 철저하게 천주교인을 잡아 처벌하라는 내용의 교서를 좌우 포도대장에게 내리게 되었고, 이때에 미국 군함에 몰래 찾아간 일이 있었다는 죄로 이 세 분이 효수(梟首)된 것이다.

  문헌상의 갑곶진두의 위치를 연구한 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는 그 자리를 매입하여 지금의 갑곶순교성지를 조성하였고, 2000년 대희년을 맞아 집중적으로 개발하였으며, 사제를 파견하여 순례자들의 신심을 돕고 있다. 갑곶순교성지http://www.gabgot.net/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곶순교성지

 

 

 

 

 

강화 앞바다가 한눈에

경기도 서쪽 끝단에 위치한 넓이 406평방 킬로미터의 강화도는 섬 전체가 하나의 역사 및 문화 유적이다.
 
수도 방어의 요충지로서 고려 시대부터 외세와 격렬하게 충돌해 온 역사의 현장인 강화는 그래서 호국의 기상이 돋보이는 곳이기도 하지만 그 와중에서 혹독한 박해를 겪어야 했던 신앙 선조들의 믿음과 순교에 이르는 열정도 함께 지니고 있다.
   
병인박해의 회오리는 강화 대교 서쪽 끝에 서 있는 갑곶 돈대(甲串墩坮)에서 일기 시작했다. 버스를 타고 강화 대교를 건너면서 강화동 왼쪽으로 보이는 갑곶 돈대는 1679년에 축조돼 8문이 대포를 설치한 포대를 두었다. 조선 숙종 5년(1676년) 강화에는 모두 5진(鎭) 7보(堡) 53돈대(墩坮)의 국방시설이 설치됐다.
 
1866년 병인 양요 때 조선 정부가 프랑스인 성직자 9명을 처형한 책임을 물어 강화도를 점령하고자 했던 프랑스 함대가 바로 이곳으로 상륙,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했다. 결국 프랑스 군은 후퇴했으나 이로인해 강화 지방에서는 병인박해라고 불리는 새로운 박해를 받게 되었다. 갑곶 돈대에서 바라다보이는 바다 건너편의 백사장에서 많은 신자들이 이슬로 사라졌다.
 
이 박해로 성연순과 원윤철이 통진에서, 1868년 박상손, 우윤집 등이 강화에서 순교했고 1870년에는 통지에서 권 바오로가 순교했다. 갑곶 돈대와 건너편 백사장은 당시의 처절한 순교 현장을 아스라이 되살려 주곤 한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