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북성동 차이나타운

2011. 7. 19. 19:36전국 방방곡곡 여행지/경기도 여행지

 

인천 북성동 차이나타운

 

인천역에 내려서 자유공원쪽을 바라보면

누구라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중국거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우뚝 솟은 패루를 지나

계속 경사진 길을 3백여 미터를 걸으면

T자형으로 길이 양쪽으로 나뉘고

주변 상가는 온통 중국의 거리에 온 듯이 느껴진다

 

 

 

 

 

 

붉은 색 간판과 홍등이 내걸리고, 음식점이나 진열된 상품들도 거의가 중국 일색이다.
이렇게 화려하게 단장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볼거리, 먹을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지만

이들의 과거를 뒤집어 보면 누구보다도 눈물겨운 세월을 보내면서

이곳에서 화교사회의 명맥을 이어 오신 분들이다.

 

 

 

 

 

다른 나라에 있는 차이나타운과 인천의 차이나타운은 근본적으로 형성구조가 다르다.
외국의 경우 오랜 세월을 두고, 최초 노동자부터 근대 중국의 불안한 정국을 피해

이주한 중산층까지 포함하여 중국거리가 형성된 것에 비하여, 우리나라는 짧은 기간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는 근대화 과정에서 가까운 거리의 이점을 살려

주로 상업을 위해 이곳에 안주를 한분들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1882년 최초로 40여명의 군역 상인들이 이 땅에 정착한 이후 2년 후에는

청나라 조계지(집단 거주지역)가 형성되었다.

조선은 청국의 속국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청국인들은 당시 청정부의 후원을 받으며

당시 한국에서는 귀한 물품인 비단, 광목, 농수산품 및

경공업품을 들여다 팔다 보니 엄청난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장사가 잘되니 이곳 인천에 상가건물이나 주거할 집을 지을 필요가 생기니,

중국식 건축에 필요한 목수, 기와공, 미장공들도 한국에 오게 된다.

특히, 인천과 뱃길이 트인 산동성에서는 조선의 인천은 돈벌이가 잘되는 곳으로,

 또는 의화단 사건에 관련된 이들에게는 피란처로 그들의 집결지 같은 곳이었다.
이지역을 당시에는 청나라 관청(청국 영사관)이 있는 곳이라 하여

청관이라고 불렀는데, 일본인들은 이곳을 중국을 비하하는 명칭인 지나정이라고 불렀다.

 

 

 

 

외국에 나가 살더라도 조국이 잘 살아야 대우를 받는다.

1894년 일본과의 전쟁에서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손들고 중국 중앙 북경에는

서방세력에게 안방을 내주고, 타이완, 만주지역도 문서로만 중국령 일뿐

 일본이 주인 노릇을 하니, 한국에 있는 화교들의 생활도 그리 안정적 일 수는 없었다.

그래도 한국인에게는 대국인으로 행세하며 거들대던 세월도

한국전쟁과 인천상륙작전으로 거의 파괴되고 만다.

영흥도 앞바다에서 정박하여 인천을 향한 함포사격을

 정면으로 받은 곳이 지금의 차이나타운이다.

사진으로 보면 당시 청관 거리는 2층으로 된 중국식 건물이

 즐비하게 보이건만 지금 남아있는 곳이 아주 드물다.

 

 

 

 

전쟁 후에도 화교 사회는 한국에서 외면을 당한다.

화폐개혁으로 장롱 속 돈을 모두 신고해야 했고,

외국인 부동산 소유제한으로 그들이 반세기 이상 가꾸어온 주안,

 용현동, 부평 일대의 황금 농장이 헐값에 판매되거나 남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니

 거의 반수 이상의 화교들이 이 땅을 떠난다. 더군다나 화교들만이 경영하던

중국 음식업계에 한국인들도 경영허가를 내주니 그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움을 겪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