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年 歷史의 香氣가 살아 숨쉬는 인흥마을~남평문씨본리세거지

2011. 7. 1. 22:16전국 방방곡곡 여행지/경상도 여행지

 

 

200年 歷史의 香氣가 살아 숨쉬는 대구 인흥마을(남평문씨본리세거지)

 

고려말 충신 문익점의 18세손 문경호(文敬鎬, 1812~1874)가 19세기 중엽 터를 잡아 만든 마을로

광거당, 수봉정사, 인수문고 등 전통가옥 9채와 재실 2채, 문고 1채가 들어서 있다.

마을은 건축연대가 200년 미만이지만 전통적인 영남지방 양반가옥의 틀을 지키고 있으며,

오늘날의 도시계획처럼 도로망이 정비되어 있는등 주위의 환경과 조화시켜

마을을 구성한 예 또한 희소하여 큰의의를 갖고있다. 세거지 맞은 편에는

 1825년에 세워진 인흥서원이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다.

월배에서 화원초등학교를 지나서 천내천을 따라 3km정도 내려가면

 왼쪽으로 한옥이 많이 보이는 곳이 인흥마을이며 바로 남평문씨본리세거지이다.

 주택들은 산 밑의 양지 바르고 아늑한 장소에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천내천이 흐르고 있어 명당의 기본적인 요건인 배산임수의 조건을 갖춘 마을이다.

 

 

 

 

 

 

 

인흥마을은 살림집 아홉 집이 우물정자형에 가까운 구도 속에 가지런히 앉아있고 곧은 마을 안길과 흙돌담장이 이어져 구도 속에 가지런히 앉아있고 외관상 전체가 하나로 보이는 것이 다른 이름 있는 마을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빼어난 주변 경관 속에 2~3백년 묵은 소나무, 회화나무, 은행나무 등 노거수와 담 너머로 볼 수 있는 매화나무, 석류나무, 감나무 등이 잘 어울려 풍치를 한결 드높이고 있다. 지금은 2~3백년이 된 노송들로 시 당국이 ‘남평문씨 세거지 주변의 풍치림으로 보존가치가 있어 자연보호림’으로 지정되어 있다.

 

 

 

 

광거당의 9칸으로 구성된 一자형 대문채의 중앙에 있는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대문채에서 바로 광거당 본 채가 보이지 않도록 차면장遮面檣이 가로막고 있다. 이 차면遮面 담 우측으로 살짝 비켜들면 앞쪽에 넓은 마당을 두고 광거당이 한층 높게 앉아 있다. 집의 구도 또한 옛것을 따랐고 울타리 안의 수목들도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살리고 있다. 봉황이 벽오동나무에 둥지를 틀고 대나무 열매를 먹고 산다는 전설을 여기에서 느낄 수 있으며 울타리 안팎에 자리하고 있는 회화나무와 소나무의 노거수老巨樹들도 눈길을 끈다.

 

 

 

 

광거당은 만권萬券의 전적典籍을 소장하여 국내외 학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참고와 토론의 전당으로 알려져있다. 세상에서는 특히 망국의 해인 1910년에 당堂을 세워 후손들의 교육의 장소로, 사우士友들의 강론의 집합소로, 그리고 학문진흥에 이바지한 사실에 높은 평가를 하고 있다. 이는 문자와 글이 없어지면 나라와 민족이 망한다는 절실한 인식하에 글을 숭상하고 후진을 기르기 위한 방안이었으며, 일본에 대한 저항의지의 발로였다. 특히, 광거당廣居堂은 일제 강점기 때 조선의 앞날을 걱정하고 망국의 아픔으로 토로하는 사국토론장으로 주목을 받았다. 당 내에는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이 지은 당의 기문記文과 석촌 윤용구石村 尹用求가 쓴 당호堂號 현판, 그리고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과 근세 중국의 명사 장건張등의 편액과 주련이 걸려 있어 찾는 이로 하여금 지금도 옛 모습을 살필 수 있게 한다.

 

 

 

 

 

 

1930년까지 광거당 이곳에서 ‘오약산만고吳藥山漫稿’,’박만성문집朴晩醒文集’,’이대산실기李大山實記’, ’이기휘편理氣彙編’, ‘제양록制養錄’,’결송장보決訟場補’와 선조先祖의 ‘경정공사적척록敬靖公事蹟錄’ ‘축숭공실기忠肅公實記’, ‘남평문씨세보南平文氏世譜’ 등 여러 종류의 소중한 문헌을 간행하여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문진흥과 후진 양성에 힘썼다. 후은과 수봉 이후 집안에서는 그 유지를 이어 1933년 10개항의 견행절목과 9개항의 예비절목으로 된 당전수규약을 만들어 유지 운영해 왔으며 지금도 그 근본은 남아있다. 그리고 1940년대 말까지도 소암 김현동의 강학으로 학문하는 맥을 유지해 왔으나 시대와 환경의 변화로 현재는 특별한 경우 이외에는 사용을 하지 않고 있다.

 

 

 

 

 

광거당의 누마루 바깥에 추사의 글씨로 ‘수석노태지관’ 편액이 걸려 있다. ‘수석과 묵은 이끼와 연못으로 이루어진 집’이란 뜻이다.
지금은 아쉽게도 묵은 이끼와 연못은 메워지고 없어졌지만, 당시 광거당을 다녀간 문인들의 멋과 향기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광거당은 담장 안쪽으로 분홍빛의 배롱나무가, 담장 너머로 노송이 우거져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케 한다. 대문 안쪽의 헛담에는 깨진 기와 조각으로 아로 새긴 꽃 한송이가 질박하다.

 

 

 

 

 

 광거당의 평면은 ┤자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2칸의 온돌방을 두었으며 우측 뒤로도 역시 온돌방 둘이 이어져 있다. 오른쪽 전면에 누樓는 1칸을 돌출 시켰는데 누마루는 툇마루보다 한 단이 높게 구성된 점이 특이하다. 전퇴의 측면에서 이주하는 툇간까지는 누樓의 넓이로 잡아서 밖에서 보면 2칸처럼 보이고 충량이 졌는데 그 치목治木과 결구結構가 정치精緻하다. 대청의 전면과 우측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마루를 두었으며 나머지는 쪽마루를 두었다. 광거당의 전면과 우측면 외진주는 둥근 기둥으로 하였다. 그 외의 기둥은 모난 기둥을 세워 무익공無翼工, 소루수장小累修粧 집이며 전면 부분은 5량가樑架이고 우측 부분은 3량가이다. 그리고 대문채는 내측에서 보아 좌측으로부터 방, 고방, 마구간, 대문간, 방, 마루방, 부엌, 헛간 순으로 9칸 一자 집이다. 이 건물에 사용된 화강암 기단석基壇石과 초석 등은 인흥사지仁興寺址에서 나온 것이며, 주요 목재는 춘양목春陽木으로 낙동강을 통해 운반되었다고 한다.

 

 

 

 

 

 

 

 

 

 

 

 

 

 

 

 

인흥마을의 인수문고는 한국 최고의 민간도서관으로 문씨 집안 공동문고잉 문중문고이다. 서양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도서관이다. 문중 문고는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개인문고와 다르고, 그 외 사람들에게는 개방되지 않기 때문에 공공 도서관과도 다르다. 문중 문고의 이러한 성격은 유교 문화를 가지고 있는 곳에서만 가능한 도서관이다. 유교에서는 집안과 성씨를 매우 중요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문중 문고는 한국의 유교적 전통을 확립하는데 한 몫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인수문고는 국내최대의 8,500여책의 고서를 보유하고있다.문고에는 경부經部 536책, 사부史部 1,813책, 자부子部 599책, 집부集部 4,011책이 수장되고 있으며, 집부가 약 60%로 가장 많다. 집부는 대개 우리나라의 문집이며 일부 중국의 것도 있다.

다음은 사부史部로써 전체 장서의 약 26%를 차지하고 있으며, 특히 중국의 정사류가 500여 책으로 거의 완전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사 부문도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국조보감國朝寶鑑 등 기본 사료史料를 거의 망라하고 있다.

경부經部에 있어서도 당시 교과서로 많이 사용되던 사서류가 143책으로 가장 많으며, 제경총의 209책은 십삼경주소 109책이 포함됨으로써 그 수가 많이 나타난 것이다. 자부子部에 있어서는 유가류의 도서가 가장 많다. 그 밖에 병가兵家, 농가農家, 의가류醫家類의 도서와 천문天文, 산력算曆 등의 책도 고루 갖추어 있고 특히 의가류의 도서는 748책이나 된다. 그렇게 보면 유가류 일색에서 벗어나 그 수집대상이 매우 광범위하고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는 근래에 나온 문집과 영인본, 양장본으로 된 전적류 약 1,000책과 선고先考의 장서 약 600책이 추가되어 총 약 8,500여 책으로 추산하고 있다.

또 하나의 특징은 모두가 완질본完帙本이라는 점이며, 특별히 오동나무 상자를 만들어 분류한 책들을 모두 그 속에 보관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아마도 책을 쉽게 찾아볼 수 있게하고 좀이나 먼지도 방지하는 세심한 배려라고 할 수 있다.

 

 

 

 

 

책을 구해옹 과정은 전문가의 추천을 받아 구입하려는 책을 선정한 다음, 중국 상하이에서 오는 배편에 실어 목포로 보내도록 했다고 한다. 배가 도착했다는 기별을 받으면 문씨 집안에서는 목포로 사람을 보내 만만찮은 거리를 걸어 책을 가져와야만 했다.

책을 운반하는 수단은 다름 아닌 소달구지였다. 책을 구하는 것이 힘이 드니 올 때마다 한번에 수백 권씩 주문했을 것이고, 책을 실은 소달구지는 목표에서 출발하여 대구까지 덜그덕 거리며 먼 거리를 한 발작씩 밟아 이동했을 것이다.

만권당의 책은 이렇게 모아졌으며, 상상도 못 할 돈과 시간과 정성이 들어간 것이다. 또한 학문에 대한 열정과 자기의 주체성을 지키겠다는 자존심, 그리고 그 시대 명사들과의 다양한 인맥이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었다.

 

 

 

 

 

만권당을 세운 목적은 자녀 교육에 있다. 당시는 한일병합이 되면서 일제가 일본식 교육기관을 설립하던 시기였고, 문씨 집안에서는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다. 문씨 집안 사람들은 일본 사람이 지은 학교에 가면 자식들이 전부 일본인이 되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집안에서 자식을 가르치자고 생각했다. 결국 이러한 목적 아래 독자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가진 사립학교이자 도서관을 만든 것이다.

 

 

 

 

 

 

 

 

현대적 의미의 도서관이 등장하기 전까지 우리나라에는 네 가지의 유형의 도서관이 있었다. 첫째는 정조 때 세워진 규장각과 같은 왕립 도서관, 둘째는 성균관 ㆍ향교ㆍ서원 등 교육기관에서 설치한 학교 도서관, 셋째는 개인 문고, 마지막으로 문중 문고이다. 이들 중 문중 문고는 문중의 자녀들을 교육하기 위한 문고로, 개인 보다는 좀 더 공적이며 학교 도서관보다는 조금 사적인 형태의 문고였다. 조선시대는 유교 사회였으며 집안門中을 중시했기 때문에 이러한 형태의 문고가 많이 있었다.

 

 

 

 

 

 

 

 

 

 

 

 

 

 인흥마을의 돌담길 또한 아름답기 그지없다 담장에 접시꽃, 능소화등이 피어 담장과 조화를 이루고담장주변에 심어진 2~3백년 묵은 소나무, 회화나무, 은행나무 등 노거수와 담 너머로 볼 수 있는 매화나무, 석류나무, 감나무 등이 잘 어울려 풍치를 한결 드높이고 있다.

 

 

 

 

관광정보

주소~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 401-2

전화~053-631-86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