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0. 14. 18:05ㆍ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가지정 문화재
을사늑약을 체결한 비운의 현장이자 고종이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곳인 중명전
중명전(重明殿)은 1897년경 황실 도서관으로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에 의해 설계된 서양식 전각이다.
원래의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었으나, 1904년 경운궁(현 덕수궁) 화재 이후
고종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면서 중명전으로 이름을 바꾼다.
1905년 11월 18일 새벽,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운의 현장이다.
중명전은 원래 정동 지역 서양 선교사들의 거주지에 속해 있다가,
1897년 경운궁(현 덕수궁)이 확장되면서 궁궐로 편입되었다.
이때 당호를 수옥헌이라 짓고, 주로 황실 도서관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1901년 화재로 전소된 후 재건되어 지금과 같은 2층 벽돌 건물의 외형을 갖추게 되었다.
건물의 설계는 독립문, 정관헌 등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A.I. Sabatin)이 하였다.
1904년 경운궁 대화재 이후 중명전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 황제의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1915년 일제가 경운궁을 축소 훼손하면서
경성구락부(Seoul Club)에 임대되었고
1925년 화재로 외벽만 남기고 소실된 뒤 다시 재건하여
외국인을 위한 사교 클럽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광복 이후 자유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유재산으로 편입되었다가,
1977년 중명전은 다시 민간에 매각되었는데 관리 소홀과
개조로 원형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다.
1983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되었다.
2007년 2월 7일 사적 제124호로 덕수궁에 편입되었다.
2009년 12월 복원을 거쳐 2010년 8월부터 전시관으로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문화유산국민신탁에게 중명전 전시관의
관리 운영 및 안내해설사 배치 운용을 위탁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이곳에서 불법적으로 체결되었으며,
이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국제 사회에 알리고자
1907년 4월 20일 헤이그 특사로 이준 등을 파견한 곳도 중명전이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켰다.
을사늑약은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 정부의 박제순과
일본제국 정부의 하야시 곤스케에 의해 불법으로 부당하게 체결된 원천무효조약이다
. 체결 당시 정식 명칭은 ‘한일 협상 조약’이며, 을사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을사조약, 을사오조약, 을사보호조약이라 부르기도 한다.
일본은 제2차 한일 협약(第二次韓日協約,: 第二次日韓協約)이라고 부르며,
한국에서는 일본에 의해 강제로 맺은 조약이라 해서
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조약은 1965년 한일국교를 정상화하는
한일기본조약의 제2조를 통해 무효임을 상호 확인하였다.
당시 을사늑약을 보도한 신문들
고종이 외국기자들에게 전달한 친서
헤이그 특사 사건( - 特使 事件)은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파견하려 하였던 사건이다.
1907년 고종은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가 소집하는
제2회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조약이 대한제국 황제의 뜻에 반하여
일본제국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폭로하고 을사조약을 파기 하고자했다.
고종은 1907년 4월 전 평리원 검사 이준에게 신임장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내는 친서를 주어 만국회의에 나가 조선의 실상을 만천하에 알리도록 조처했다. 이에 따라 이준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을 만나 시베리아를 거쳐 당시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서 전 러시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을 데리고 헤이그에 도착했다.그러나 일본제국과 대영제국 등의 방해와 같은 제국들인 서구의 방관으로 조선 대표들은 회의 참석과 발언을 거부당하고 말았다. 영국은 인도 지배를 묵인받는 대신 일본의 조선지배를 묵인하는 영일 동맹에 따라 일본을 지지한 것이었고, 러시아는 러일 전쟁의 여파로 일본을 견제할 목적을 가지고 조선의 특사 파견을 도왔던 것으로 추정된다.그러나 영국 언론인 W. 스테드의 주선으로 한국 대표들은 평화회의를 계기로 개최된 국제협회에서 이위종이 유창한 프랑스어 실력으로 조선의 비통한 실정을 호소하는 연설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조선을 위해 호소한다'는 제목의 연설 내용은 세계 각국 언론에 보도되어 주목을 끌었으나 조선의 처지를 불쌍히 여길 뿐 구체적인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이후 이준은 헤이그 특사활동 20일 만에 머물던 호텔에서 사망하는데, 아직까지도 이준의 죽음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홧병에 의한 분사설, '단독' 감염설(일본 정보문서 기록), 자살설, 독살설 등 여러 주장이 제기되고 있을 뿐이다.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7월 20일 양위식을 강행하였다. 그리고 이어 순종이 즉위하면서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었다.
2차만국평화회의에 한국도 초청국가 명단에
들어 있으나 응답이 없는 나라로 분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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