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역사탐방] 서대문독립공원

2011. 11. 29. 12:00서울 어디까지 가봤니?/서울 여행지

[서울 역사탐방] 서대문독립공원

 

일제강점기에 의병투쟁, 3·1독립만세운동, 항일투쟁 등으로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다 순국한 선열들을 기리기 위하여 조성되었다. 이곳의 옥사는 1908년 일제가 침략을 본격화하기 위하여 지은 근대식 감옥으로, 경성감옥이라는 명칭으로 문을 열었는데 항일투사들이 늘어나자 일제가 마포구 공덕동에 새로 감옥을 지어 1912년에 서대문감옥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후 1923년에는 서대문형무소로, 1946년에는 경성형무소로, 1950년에는 서울형무소로 바뀌었고 1961년에는 서울교도소로 개칭되었다가 1967년 7월에 서울구치소로 바뀌는 등 여러 차례 그 명칭이 바뀌었다.

건립 당시에는 감방 480평, 청사 및 부속건물 80평으로, 5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다. 당시 전국에 있는 8개 감옥의 총수용인원이 300명이었는데 그에 비하면 엄청난 규모였다. 4·19혁명, 5·16군사정변 등 정치적 변동을 겪으면서 많은 시국사범들이 수감되어 있던 이곳은 도시의 발달로 인하여 구치소 위치로는 적당하지 않아 1987년 11월 15일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갔다. 이때 서울시가 법무부로부터 이곳을 매입하여 1988년 조성공사를 시작하였고, 1992년 8월 15일 광복절 제47주년을 맞이하여 독립공원으로 개원하였다.

공원 규모는 10만 9193.8㎡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역사전시관, 제9~13 옥사와 중앙사, 나병사, 추모비, 사형장, 지하옥사를 포함하고 있고 그외 시설은 순국선열추념탑, 3·1독립선언기념탑, 독립문, 독립관 등이다. 1908년에 지어진 옥사는 일제가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독립투사들을 가두었던 곳이다. 서울구치소가 의왕으로 이전될 당시 옥사는 모두 15개 동이었으나 모두 없애고 보존가치가 있는 제9~13옥사와 중앙사, 나병사, 보안과청사, 사형장, 담장, 망루는 보존하고 있다

 

 

 

 

 

 

독립공원은 공원입구에 주택ㆍ상가지역이 무질서하게 자리 잡고 주요 시설이 산재되어 있어 시민들의 공원 이용에 불편이 많았으나 2007년 4월 16일부터 추진한 독립공원 재조성 사업을 통해 2009년 10월 28일 재개장하여 독립문, 역사관, 독립관, 순국선열추념탑 등을 유기적으로 연결함과 동시에 시민이용에 불편을 초래했던 노후한 공원시설을 정비하여 공원을 방문하는 학생, 관광객, 시민고객들의 편의를 최대화 하였습니다. 특히, 독립문은 그동안 시민들의 접근을 제한하였으나, 서대문독립공원 재조성 사업으로 인하여 112년 만에 시민들에게 개방하게 되었습니다.

  • 서대문독립공원은 역사의 현장임과 동시에 주민들의 포근한 쉼터이기도 하고 자연 속 휴식처 어울 쉼터에서는 다양한 체육시설을 이용하고 여가를 즐길 수 있으며, 또한 부모와 자녀가 함께 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어 아이들이 배울 역사의 산 교육장소입니다.

 

 

 

 

 

교양시설
- 순국선열 추념탑 : 면적 1,200㎡, 높이 22.3m
- 3.1독립선언 기념탑 324㎡, 높이 4.2m
- 서재필선생동상 : 면적 16㎡, 높이 6.3m
- 독립문 : 면적 162㎡, 높이 11.48m
- 독립관 : 지상 1층, 지하1층 연면적 554.88㎡
- 관리시설 : 관리사무소 1,355.38㎡, 변전실 84㎡, 안내판 14개, 공원 등 151본

 

 

 

 

 

 

  • 사 적 지 : 서대문구청 관리
  • 독립문(사적 제32호) 영은문주초(사적 제33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사적 제324호)
    - 29,218㎡ 는 1997. 6. 1일자로 서대문구청 관리이관
    - 옥사 7동, 사형장 1동, 전시관(보안과 청사), 나병사 1동, 조경시설 등
  •  

     

     

     

    독립관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독립공원 안에 있는 독립협회의 건물이다. 원래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옛 모화관(慕華館) 건물을 1897년 5월에 독립협회에서 독립관으로 개축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97년에 다시 지었다.

     

     

     

     

     

     

     

     

    서재필선생동상 : 면적 16㎡, 높이 6.3m

     

     

     

     

     

    독립문 (獨立門) 사적  제32호

    갑오개혁(1894∼1896)은 내정개혁과 제도개혁을 추진하였던 개혁운동이다. 그러나 외국세력의 간섭으로 성공하지 못하였고, 나라의 자주독립 또한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국민들은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는 어떠한 간섭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게 되었다.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의 주도하에 국왕의 동의를 얻고 뜻있는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으며,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독립문을 완성하였다.

    화강석을 쌓아 만든 이 문의 중앙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고, 왼쪽 내부에는 정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다. 정상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으며, 홍예문의 가운데 이맛돌에는 조선왕조의 상징인 오얏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 위의 앞뒤에는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는 글씨와 그 양옆에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 문앞에는 영은문주초(사적 제33호) 2개가 남아있다.

    원래 남동쪽으로 70m떨어진 길 가운데에 있었는데, 1979년 성산대로 공사에 따라 지금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서울 영은문 주초 사적  제33호

    조선시대에 중국의 사신을 맞아들이던 모화관 앞에 세웠던 주춧돌이다.

    개화기에 우리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다짐하는 의미로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면서 그 기둥을 받치던 밑돌인 주초만 남게 되었다. 모화관은 조선 태종 7년(1407)에 처음 세우고 모화루라 하였는데, 그 뒤 세종 12년(1430)에 모화관이라 이름을 바꾸고 그 앞에 상징적인 의미의 홍살문을 세웠다. 중종 32년(1537)에 홍살문보다 격식을 갖춘 형식의 문을 만들고 ‘영조문’이라 하였다가, 중종 34년(1539)에는 중국 사신의 건의로 영은문이라 이름을 고쳤으며, 연주문·연은문이라고도 하였다.

    중종 때 만들어진 문은 1칸 규모이며 두 개의 긴 주춧돌 위에 원기둥을 세우고 우진각지붕을 얹었는데, 지붕은 청기와로 덮고 각종 동물 모양을 조각한 잡상을 배치하였다. 남아 있는 2개의 주초는 2단의 사각형 받침돌 위에 기둥처럼 길게 세워져 있다. 위에 놓인 받침돌에는 2개씩의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다.

    1896년 독립문이 세워지면서 주초만 그 앞에 세워두었는데, 1979년 성산대로 공사로 인해 독립문과 함께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