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여행] 강릉 신복사지 삼층석탑 및 석불좌상

2011. 12. 8. 18:30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가지정 문화재

 

[강릉여행] 보물 제84호,보물 제87호 강릉 신복사지 삼층석탑 및 석불좌상

 

신복사지는 강원도 강릉시 내곡동에 있었던 절터로 850년(문성왕 12)경에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창건하였다. 임영지(臨瀛志)에는 이 절의 창건과 관련된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즉 신라 말기에 어느 처녀가 우물에 비친 햇빛을 보고 그 물을 마시자 임신을 하였다. 집안사람들이 낳은 아기를 얼음판 위에 내다버렸으나, 나르는 새가 아이를 품었고, 서광(瑞光)이 주위를 맴돌았으므로 괴이하게 여겨 다시 데려와서 이름을 ‘범(梵)’이라 하여 길렀다.

범은 어려서 출가하여 고승이 되었으며, 고향에 신복사와 굴산사(掘山寺)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창건 이후의 역사 및 폐사 시기는 전하지 않으며, 현재의 절터에는 보물 제84호로 지정된 신복사지석불좌상과 보물 제87호로 지정된 신복사지삼층석탑이 있다. 석불좌상은 원통형의 관을 쓴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며, 풍만한 몸의 굴곡과 자연스럽게 내려진 옷자락의 사실적인 묘사는 생동감마저 느끼게 한다.

 

 

 

 

 

 

 

 

 

보물 제84호 신복사지 석불좌상

 

강원도 강릉시 내곡동 신복사지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 높이 181㎝. 보물 제84호. 석조삼층석탑 앞에 무릎을 꿇고 공양하는 자세로 앉아 있는데 근처의 월정사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개태사석조보살좌상(頭部 결손)과 함께 고려 초에 조성된 독립 공양상으로서 주목된다.

이 보살상은 한송사석조보살좌상(국보 제124호)과 월정사석조보살좌상처럼 원통형의 높은 관을 쓰고 있다. 그러나 관 위에 천개(天蓋)가 놓여 있기 때문인지 관의 높이도 낮고 약간 뒤로 젖혀진 모습이다. 관의 표면과 관 위의 천개 안쪽에 커다란 구멍들이 있는데, 금속 장식을 달기 위하여 뚫었던 듯하다.

부드럽고 복스러운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입을 안으로 꼭 다문 천진한 모습은 청룡사석조여래좌상(보물 제424호)의 입 모양과 흡사하다. 눈썹은 초승달 같은 곡선을 이루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귀에는 양끝에 구멍이 뚫려 있어 금속제 귀걸이를 끼웠던 것으로 믿어진다. 삼도(三道)는 편평한 목 위에 선각(線刻)으로 층을 이루며 새겨졌고 무늬 없는 목걸이와 팔찌를 두르고 있다.

두꺼운 천의가 어깨와 가슴에 걸쳐졌다. 왼팔을 무릎 위에 올리고 모아 쥔 두 손은 가슴에 꼭 붙이고 있으며 손에 뚫린 큰 구멍에는 지물(持物)의 손잡이였던 금속주(金屬柱)가 아직도 남아 있다.

그리고 이 보살상은 원형의 대좌받침이 있어 이것을 안이 움푹한 원래의 연화대좌에 끼워 넣게 되어 있는데 현재 대좌받침의 앞부분이 없어졌다.

대좌 위에는 두 개의 금속주가 있으나 원래는 대좌받침 촉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지금은 대좌가 정확히 맞추어져 있지 않아서 밖으로 돌출한 것이다.

연화좌 밑에는 폭이 좁은 중대석이 있고 거기에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그 아래 넓은 팔각형의 지대석이 묻혀 있으며 복련(覆蓮 : 아래로 향하고 있는 연꽃잎)의 하대가 있었을 것이지만 전하지 않는다.

이 상은 전체적으로 풍만한 신체나 다정한 얼굴에서 상당히 인간적인 분위기를 준다. 상에 있어서는 반타원형으로 조각된 보발(寶髮)이나 규칙적인 간격으로 나누어진 옷주름 등에서 약간 형식화된 점이 발견된다.

따라서 같은 강원도 명주 지방에서 제작된 한송사지보살좌상이 보여 주는 신라적인 요소가 차츰 사라지고 양식화가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초기 10세기 후반의 작품이라고 생각되는데, 한송사지보살좌상·월정사석조보살과 함께 고려 초기에 강원도 명주 지방에서 유행하던 불상 양식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보물 제87호 신복사지 삼층석탑

 

신복사의 옛 터에 남아있는 탑이다. 이 탑은 2층의 기단(基壇)을 쌓고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것으로, 각 부분의 모습들이 특이하다. 바닥돌의 윗면에는 연꽃이 엎드려 있는 듯한 모양의 조각을 하여 둘렀고, 아래층 기단의 4면에는 안상(眼象)을 3개씩 새겨 넣었다. 탑신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새겨 얹어 놓았다. 탑신에는 부처의 사리나 불경 등을 모셔두는데, 1층의 몸돌에 이를 안치하는 방인 감실(龕室)모양의 조각이 있다. 1층의 몸돌에 비해 2·3층은 갑자기 그 크기가 줄어들어 매우 얇다. 지붕돌 역시 얇아서 귀퉁이끝은 치켜올림이 희미하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3단이다.

꼭대기에는 드물게 머리장식이 온전히 남아있는데, 각 부분의 높이에 비해 폭이 넓어 안정감을 준다.

탑의 앞쪽에는 한 쪽 무릎을 세우고, 두 손을 받치듯이 들고 있는 강릉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보물 제84호)이 있다. 이러한 모습은 같은 강원도 내의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국보 제48호)과 비슷하여 이 지방의 특색이 아닐까 짐작된다. 탑의 기단과 몸돌의 각 층 밑에는 널돌로 괴임을 넣었는데, 이러한 양식은 고려시대에 자주 보이는 모습 중 하나이다. 또한 아래층 기단에 안상이 새겨진 것이나,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가 3단으로 되어있는 점도 고려 전기의 석탑양식을 잘 따르고 있다.

 

 

 

 

 

 

 

 

 

 

 

 

 

 

 

 

 

 

 

 

 

 

 

 

 

 

 

신복사지 석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