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선조들의 생활의 숨결을 느낄수 있는 남산골한옥마을

2012. 1. 11. 06:30서울 어디까지 가봤니?/서울 여행지

  [서울]선조들의 생활의 숨결을 느낄수 있는 남산골한옥마을

 

서울의 상징인 남산은 옛 이름을 목멱산이라고 하였으며, 도성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남산으로 불리어 왔다. 남산은 그 자연의 경치가 아름다워 우리의 조상들이 골짜기마다 정자를 짓고 자연의 순리에 시·화로 화답하는 풍류생활을 하던 곳으로서 각종 놀이와 여가생활을 위하여 수려한 경관을 찾는 선남선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었다.
이 곳 남산골 전통정원 내에는 그 동안 훼손되었던 지형을 원형대로 복원하여 남산의 자연식생인 전통 수종을 심었으며, 계곡을 만들어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하였고, 또한 정자·연못 등을 복원하여 전통양식의 정원으로 꾸몄다.
정원의 북동쪽 7,934㎡ 대지에는 시내에 산재해 있던 서울시 민속자료 한옥 5채를 이전, 복원하고 이 한옥에 살았던 사람들의 신분성격에 걸맞는 가구 등을 배치하여 선조들의 삶을 재조명 하였으며, 전통공예관에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기능보유자들의 작품과 관광상품을 항상 전시·판매하고 있다.
정원의 서쪽에는 물이 예스럽게 계곡을 흐르도록 하였고, 주변에는 고풍의 정자를 지어 선조들이 유유자적하였던 남산 기슭의 옛 정취를 한껏 느끼도록 하였다.
전통정원 남쪽에는 서울 정도(定都) 600년을 기념하는 타임캡슐을 1994년 11월 29일 지하 15m 지점에 매설하였다. 보신각종 모형의 타임캡슐 안에는 서울의 도시모습, 시민생활과 사회문화를 대표하는 각종 문물 600점을 수장함으로써 현 시대의 사회상이 400년 이후인 2394년 11월 29일에 후손들에게 공개될 것이다.

 

 

 

 

 

 

 

 

 

 

 

 

 

 

 

삼각동 도편수 이승업 가옥

이 가옥은 조선말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 의하여 경복궁(景福宮)이 중건(重建)될 때 도편수(목수의 우두머리)였던 이승업이 1860년대 지은 집으로 중구 삼각동 32-6번지에 있던 것을 이곳 남산골 한옥마을에 이전, 복원하였다.
대문간채와 행랑채가 안채와 사랑채를 둘러싸고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만 남아 있다.
안채는 '丁(정)'자형이고 사랑채는 'ㄴ'자형의 평면이다. 안채에서 부엌과 안방쪽은 반오량(半五樑)으로 꾸며 전후면(前後面)의 지붕길이를 다르게 꾸민것은 특색이 있는 구조이다. 대청과 건넌방쪽은 일고주오량가(一高柱五樑架)로 구성되어 있다.

 

 

 

 

 

 

 

 

관훈동 민씨 가옥

이 집은 민영휘(閔泳徽, 1852~1935) 저택 가운데 일부였다. 그는 관훈동 일대 너른 땅에다 집을 여러 채 짓고 일가붙이와 함께 살았는데, 옛 터의 위치는 종로구 관훈동 30-1번지였다. 원래 집터에는 안채와 사랑채 외에도 별당채와 대문간채, 행랑채 같은 집채가 있었다고 전하나 나중에 소유자가 바뀌면서 안채와 여기에 연결된 중문간채만 남기고 모두 헐려졌다.
1998년 남산골한옥마을을 조성할 때 남아있던 안채를 옮겨 지으면서 철거되었던 건넌방 쪽을 되살렸고, 사랑채와 별당채를 새로 지었다. 전체배치는 사랑채 뒤로 안채와 별당채를 구성하였으며 담과 문으로 적절하게 공간을 나눴다. 보통 서울지방 안채는 안방 앞쪽에 부엌을 둬서‘ㄱ자형’으로 꺾어 배치하는 편인데, 이 집은 드물게 부엌과 안방을 나란하게 놓았다. 이 밖에도 고주 두 개를 세워 짠 넓고 큰 목조구조와 6칸에 달하는 부엌의 규모, 그리고 마루 밑에 뚫려 있는 벽돌 통기구 등은 당시 일반 가옥과 다른 최상류층 주택의 면모를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삼청동 오위장 김춘영 가옥

이 가옥은 조선말기 오위장을 지낸 김춘영이 1890년대 지은 집이다. 종로구 삼청동 125-1번지에 있던 것을 남산골 한옥마을에 이전, 복원하였다.
'ㄷ'자형 안채에 'ㅡ'자형 사랑채를 연결시켜 ('ㄷ') 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안채 대청은 오량가(五樑架)이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삼량가(三樑架)이다. 판대공(板臺工)을 사용하고 홑처마로 꾸미는 등 전체적으로 평민주택(平民住宅)의 양식을 보이고 있지만, 안방의 뒤쪽 벽, 즉 길가에 면한 부분에 사괴석(四塊石)과 전돌(塼石)을 사용하여 화방벽(火防壁)을 쌓아 집의 격조를 더 높인 것이 특징적이다.

 

 

 

 

 

 

 

 

 

 

 

 

 

제기동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

이 가옥은 조선 제27대 순종(純宗)의 장인(丈人) 해풍부원군 윤택영이 그의 딸이 동궁(東宮)의 계비(繼妃)로 책봉(冊封)(1906)되어 창덕궁(昌德宮)에 들어갈 때 지은 집으로 전한다. 동대문구 제기동 224번지에 있던 것을 이곳 남산골 한옥마을에 이전 및 복원하였다.
이 집의 평면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元(원)'자 모양인데 제일 윗터에 사당(祠堂)을 배치하고 그 아랫터에는 몸채를 두었다.
사당은 1960년 4.19 혁명 때 불에 타서 없어졌던 것을 복원하였으며, 사당 앞에 두 단의 석축(石築)을 쌓아 화계(花階)를 구성하였다. 몸채는 일고주오량가(一高柱五樑架)이고 앞채는 삼량가(三樑架)이다. 장대석(長臺石) 기단(基壇)과 방형초석(方形礎石), 그리고 일부에는 굴도리를 사용하여 집의 격식(格式)을 높였다.

 

 

 

 

 

 

 

 

 

 

옥인동 윤씨가옥

이 집은 대략 1910년대에 지었다고 알려진 옥인동 47-133번지 가옥을 그대로 본떠서 새로 지었다. 당시 옥인동 47번지 일대 너른 땅은 순종(純宗)의 황후인 순정효황후(1894~1966)의 큰아버지 윤덕영(1873`~1940) 소유였다. 그는 20여 채에 달하는 집을 짓고 일가붙이와 모여 살았는데, 그 가운데 서양식으로 지은 사위집(옥인동 박노수 가옥,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1호)과 윤덕영의 측실이 거처했던 옥인동 47-133번지 가옥만 남아 전한다.
1998년에 남산골한옥마을을 조성하면서 옥인동 47-133번지 가옥을 옮겨 지으려 시도했으나 부재가 너무 낡고 손상이 심해 신축하였다. 세밀하게 고증하여 지었고, 원래 터가 진 땅의 높낮이 차이까지 일부나마 되살려 본래 분위기를 재현하였다. 매우 규모가 큰‘⨅자형’안채에 사랑채 구실을 하는 마루방과 대문간이 더해져 전체 배치는 ㅁ자형을 이루지만 아무래도 안채를 위주로 짠 공감임을 짐작할 수 있다. 간소하게 민도리집을 채택하였으나 안채 앞쪽은 일반 민가에서는 보기 드물게 기둥머리에 익공(翼工)을 치장하는 등 건축구조와 세부기법은 당시 최상류층 주택의 면모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전통공예관

오랜 역사 속에서 맥을 이어온 찬란한 민족문화는 훌륭한 전통공예의 뿌리를 내렸다. 우리 민족은 각 시대마다 이웃을 통해 들어온 외래문화를 우리의 토착문화 속에 적절히 소화시키면서 독창적인 문화를 창조해 냈다.
그 가운데서도 공예문화는 생활 습성에 알맞는 쓰임새대로 다양하게 다듬고 꾸며 만들어 사용하면서 대대손손 꽃피워 왔다.
옛 서울 양반마을의 정취가 서려있는 남산골 한옥마을에 우리 전통 공예품의 정수를 한자리에 상설 전시하는 전통공예관은 '한국전통공예의 멋과 아름다움'을, 또 생활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서울장안의 명소가 되어 국내인은 물론 외국 관광객이 이곳에서 한국의 전통 생활문화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으며, 우리의 전통공예가 관광상품이 되어 세계 속에 널리 소개될 것이다.

 

 

 

 

 

 

 

 

 

 

 

찾아가는 길

 지하철- 3, 4호선 충무로역 하차, 3, 4번출구 (동국대 충무로 영상센터와 매일경제신문사 사잇길로 150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