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기념관

2012. 1. 26. 06:30우리 문화예술 공연전시 /문학관,미술관,기념관

백범 김구기념관

 

백범 김구의 삶과 사상을 통해 근·현대사를 이해하고, 분단된 조국의 자주적·민주적·평화적 통일을 지향하며, 민족의 아름다운 문화를 발전시켜 나가는 겨레의 문화적 삶의 공간으로 삼기 위해 2000년 6월 착공해 2002년 10월 22일 준공하였다.

부지면적은 5,552평, 연건평은 2,929평이며, 크게 전시관·컨벤션센터·주차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관은 2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층(417.5평)에는 백범 좌상이 있는 중앙홀을 중심으로 상징홀(연보)·영상실·유년기실·동학 및 의병활동실·치하포의거실·구국운동실·기념품점 등이 있다. 2층(312.3평)에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할 당시의 자료를 3기로 구분해 전시하였고, 그 밖에 자주통일운동실, 서거와 추모실, 정보검색관 및 전자사진관 등이 있다.

컨벤션센터는 32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컨벤션홀(242.5평), 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회의실(121.2평), 100명과 50명을 각각 수용할 수 있는 2개의 강의실로 구성되어 있다. 주차장은 대형버스 11대와 소형차 29대를 주차할 수 있는 옥외 주차장과 소형차 74대를 주차할 수 있는 지하 주차장이 있다.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의 좌상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자주 평화통일에 모두 바치신 민족의 지도자이며

겨례의 큰 스승이신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의 좌상이다.

 

 

 

 

 

 

 

 

 

 

 

 

 

 

 

 

 

 

 

어린시절 김구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백범 김구의 어린시절 이름은 창암(昌巖)이었다. 어린시절 김구는 유난스런 개구쟁이였지만, 아홉 살 때부터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글공부를 시작하였다. 열두 살에는 신분차별의 부당함을 겪고 양반이 되고자 본격적인 과거공부를 하였다. 열일곱 살에 황해도 향시(鄕試)에 응시하였으나, 관직을 사고 파는 현실을 보고 실망하여 과거에 급제하여 양반이 되고자 했던 뜻을 버렸다. 그 후 관상공부를 하던 김구는 외적인 수양보다는 마음을 닦는 내적인 수양에 힘쓰는 “마음 좋은 사람(好心人)”이 되기로 하였다.

 

 

 

 

 

 

 

 

 

 

 

 

 

 

 

 

 

 

 

 

 

 

 

 

동학.의병활동

김구는 1893년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동학에 입도하면서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 창수는 활발한 포교(布敎)활동으로 많은 사람들을 동학에 참여시키고, 한 지역의 책임자가 되어 ‘아기접주’라는 별명도 얻었다.
1894년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으로부터 팔봉접주에 임명된 김구는 그해 9월 황해도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선봉장으로 해주성(海州城)을 공격하였으나,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실패하였다. 이후 김구는 1895년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 안태훈 진사의 도움으로 은거지를 얻게 되고 그곳에서 안태훈의 아들 중근(重根)?정근(定根)?공근(恭根)을 만났다.
또한 유학자 고능선(高能善)을 만나 유학과 의리의 세계관을 배우고, 판단 실행 계속의 단계로 일을 성취해야 한다는 실천철학을 배웠다. 또한 당시 조선이 처한 상황과 이를 위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김구는 1895년 청국(淸國)의 사정을 살피고 동지들을 만나보라는 고능선의 권유에 따라 김형진(金亨鎭)과 함께 청국시찰을 떠났으며, 간도지역을 순례하면서 김이언 의병부대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김이언 의병부대는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거사의 동기를 적은 격문을 배포하고, 1895년 겨울 평안북도 강계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차하포의거

김구는 의병활동이 좌절되자, 1895년 겨울 청국과의 연합작전을 도모하고자 다시 청국으로 떠났으나, 을미의병의 봉기·단발령 정지·아관파천 등 국내정세 변화의 소식을 듣고 다시 귀향길에 올랐다. 1896년 3월 황해도 안악군(安岳郡) 치하포(河浦義)에 도착한 김구는 주막에서 조선인으로 변장한 일본군 중위 스치다를 발견하자,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한 원수를 갚고 나라의 수치를 씻는다는 우국의 일념으로 그를 처단하였다.
이 사건으로 감옥에 투옥되 김구는 죄수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애국정신을 일깨웠고, 자신은 신학문 연구에 몰두하면서 새로운 세계관과 정치 의식의 폭을 넓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시급한 과제는 일본인 몇 명을 죽이는 게 아니라, 백성들을 가르치는 일이며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일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김구가 탈옥한 후 교육계몽운동을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구국운동

김구는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진남포 엡웟청년회(Evert靑年會) 총무로 서울 상동교회에서 열린 전국대회에 참가하여 이동녕(李東寧)·전덕기(全德基)·이준(李儁) 등과 을사조약의 파기를 청원하는 상소와 반대시위 집회를 주도하였다.
김구는 구국운동기 대표적인 항일민족단체인 신민회에 참여하여 활동하던 중, 1911년 '안악사건(安岳事件)'과 '양기탁보안법사건(梁起鐸保安法事件)'으로 4년 8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김구는 옥중에서 오히려 독립에 대한 의지를 더욱 다지는 결의로, 일제의 호적(倭民籍)에서 이탈한다는 뜻에서 이름을 ‘구(九)'로, 호(號)를 백정(白丁)과 범부(凡夫)도 애국심이 자기만 하기를 바란다는 뜻에서 '백범(白凡)'으로 바꾸었다. 김구는 1915년 8월 가출옥하여 아내 최준례(崔遵禮)가 교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황해도 안악 안신학교로 돌아와 교육활동과 농촌계몽운동을 펼쳤다. 그러던 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가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가로서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大韓民國臨時政府) 활동 (1919~932/상하이)

김구는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나자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임시정부 (大韓民國臨時政府)에 참여하기 위해 중국으로 떠났다. 독립을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태겠다는 마음으로 임시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하였으나, 임시정부는 국내의 활동을 높이 평가하며 경무국장(警務局長)으로 임명하였다. 약 3년여 동안 경무국장을 맡으면서, 임시정부주요 인사를 보호하고 일제밀정을 찾아내 설득하거나 처단하면서 임시정부를 수 호하였다.
김구는 1923년 임시정부 내무총장(內務總長)에 임명되었으며, 1926년에는 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에 선출되었다. 국 무령에 선출된 김구는 우선 임시정부 개편에 착수하여, 1927년 국무령제를 국무위원들의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 로 개편하면서 임시정부에 활력을 불어넣는데 힘썼다.

 

 

 

 

 

 

 

 

김구와 가족

김구는 상하이에서 다른 독립운동가의 집을 전전하며 생활하다 1920년 부인과 아들 인이 상하이로 오면서 비로소 단란한 가정을 꾸리게 되었고, 1922년 둘째 아들 신(信)이 태어났다. 그러나 둘째 아들을 낳은 직후 몸이 허약했던 부인이 사고를 당하고 병을 얻어 1924년 1월 사망하였다. 이후 1925년 생활의 어려움을 걱정하던 어머님이 둘째아들 신과 함께 귀국하였고, 2년 후인 1927년 큰아들 인마저 귀국하여 김구는 상하이에서 다시 홀로 생활하게 되었다.
김구는 임시정부의 국무령이 된 후 일제의 침략이 중국 내륙에까지 이르게 되고 독립의 희망이 점차 약해져가자 일제와 싸우다가 죽겠다 고 다시 결심하였다. 그래서 고국에 있는 두 아들에게 남기는 유서의 형식으로 자신이 걸어온 길과 집안의 내력을 담아 백범일지를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김구와 한인애국단

김구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세력을 단결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미주지역의 동포들에게 지원과 지지를 호소하는 편지쓰기 사업을 펴나갔다. 이러한 노력으로 임시정부는 점차 정부의 위상을 되찾았으며, 편지쓰기 사업의 결과로 독립운동 자금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이 자금으로 김구는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고, 1932년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주도함으로써 임시정부 활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한인애국단의 활동은 우리민족에게 독립할 수 있다는 신념과 용기를 심어주었고, 한국인이 독립을 열망하고 있음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임시정부를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부각시켰고, 다른 독립운동단체에 영향을 주어 민족의 역량을 다시 결집시켰다.

 

 

 

 

 

 

 

 

 

 

 

 

 

 

 

 

 

 

 

 

 

 

 

충칭 임시정부청사

 

 

 

 

 

 

 

 

 

 

 

 

임시정부 활동

김구는 1940년 충칭(重慶)에 정착하면서 임시정부를 당·정·군의 체제로 개편하였다. 1940년 5월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한국국민당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9월에는 임시정부의 군사조직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이어 10월에는 주석제를 도입하여 강력한 지도체제를 갖추었다. 이 과정에서 김구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 임시정부 주석, 광복군 통수권자를 겸임하게 되어 임시정부는 김구 주석 체제로 운영되었다.
충칭에 정착한 후 좌익진영 독립운동 세력과 통합도 실현하였다. 1941년 12월 조선민족해방동맹이 임시정부 참여를 선언한 이래, 1942년 7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하였고, 10월에는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좌익진영의 인사들 이 임시의정원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1944년 4월에는 좌우연합정부를 구성하여, 좌우익 세력의 통합을 이루었다.

 

 

 

 

 

 

 

 

 

 

 

 

광복과 남북분단

김구는 1943년 충칭에서 개최된 자유한인대회에서 신탁통치 반대와 즉각 독립을 주장하였으며, 환국 후에는 반탁투쟁을 제2의 독립운동이라 명하고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어떠한 세력과도 투쟁할 것을 밝혔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국외상회의가 5년간의 신탁통치안을 발표하자, 즉각 반탁투쟁을 결의하고 12월 31일 반탁시민대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에서 전국의 행정기관과 경찰을 접수한다고 하는 '국자 1, 2호'를 선포하는 등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투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은 신탁통치를 실시하려 하였으며, 이승만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시사하였다. 이에 김구는 단 독정부 수립에 명백한 반대 의사를 표시하고 1947년 1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반탁독립투쟁위원회(反託獨立鬪爭委員 會)를 조직하고 반탁운동을 강화하였다. 아울러 임시정부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을 통하여 미국 영국 등 5개 열강에 “ 한국 인민의 자주적인 정부수립을 승인하라"고 한 4개항의 요구서를 보내는 등 자주국가 수립에 진력하였다.

 

 

 

 

 

 

 

 

 

 

 

 

 

 

 

 

 

남북협상

김구는 남북한의 통일정부 수립을 역설하며, 1948년 1월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강력히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유엔의 협조하에 남북회담에 의한 총선거 실시를 주장하였다. 또한 2월에는 남북한 두개의 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조국의 통일과 완전 자주 독립의 실현을 천명하였다. 이를 위해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1948년 2월 남북통일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남북요인회담의 개최를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제의하였고, 1948년 4월 19일 남북협상을 위해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북행길에 올랐다.
4월 20일 평양에 도착한 김구는 22일 남북한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연설을 하였다. 또한 4월 26일부터 30일까지 개최된 남북요인회담에서 외국군대의 동시 철수와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등을 결의, 공동 발표하였으며, 이 공동성명 서는 이후 통일의 지표가 되었다. 김구와 김규식은 5월 5일 서울로 돌아와 남북 통일에 대한 희망을 담은 성명서를 발 표하였지만 미군정은 이를 무시하고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경교장~ 백범 김구선생의 집무실

종로구 평동 108-1에 위치한 이 건물은 광복을 맞아 1945년 11월 23일 국내에 돌아온 김구(金九) 주석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집무실 겸 숙소로 사용한 곳이다. 환국(還國) 이후 임시정부의 첫 국무회의가 이곳에서 열렸고, 신탁통치 반대운동·남북 정치지도자 회담도 이곳을 무대로 추진되었다.
원래 이 건물은 금광업자 최창학(崔昌學)이 1938년 자신의 개인저택으로 세웠으나 광복 후 일제시대 때의 친일행위를 속죄한다는 뜻에서 김구 선생 숙소로 제공했다 한다. 경교장을 무대로 신탁통치 반대운동과 남북협상 등을 주도하던 김구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이 건물 2층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서거하였다.

 

 

 

 

서거

김구는 임시정부를 기반으로 통일 정부를 수립하고자 노력하였으나, 미국은 미국정을 확대하고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세우고자 하였다. 친일세력과 민족주의세력,좌익과 우익,정치인의 권력 경쟁 등 갈등과 대립이 심혀져갔던 당시 상황속 에 결국 1948년 남한과 북한에 각각 분단정부가 수립되고 말았다. 하지만, 김구는 지속적으로 통일 민족 국가의 수립과 자주적 평화 통일 운동을 전개하다.
1949년 6월 26일 육군 소위 안두희가 쏜 흉탄에 맞아 서거하였다.서거 후 40년만에 이루어진 국회 조사 활동에서 ‘김구 암살 사건’은 안두희에 의한 우발적 단독 범행이 아니라 친일파와 반통일세력 그리 고 당시 정권 수뇌부에 의해 면밀하게 모의되고 조직된 범죄였음이 밝혀졌다.

 

 

 

 

 

 

 

 

 

백범일지의 출간

백범일지(白凡逸志)=는 1947년 국사원에서 최초로 출판되었다. 현재까지 원본의 내용을 중심으로 약 50~60여 종, 쉽게 읽을 수 있는 위인전 형식으로 약 40~50여종이 출판되었으며, 중국어, 일어, 영어, 독일어, 몽골어판으로도 출판되어 있다. 김구에 대한 연구서들도 1990년 이후 발간되기 시작하여 약 20여종이 출판되고 있고, 각 출판사와 교육인적자원부에서 발행한 교과서에도 김구의 사상, 통일운동, 어록 등이 수록되어져 약 12종이 발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