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글픈 아픔의 역사와 함께한 광희문

2012. 2. 12. 06:30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가지정 문화재

서글픈 아픔의 역사와 함께한 광희문

 

광희문(光熙門)은

조선시대 서울의 사소문 중 하나로 동남쪽에 있었던 문이다.

광명(光明)의 문이라는 뜻에서 광희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태조 5년(1396) 8월부터 9월까지 행한 2차 도성 수축 공사 때

다른 문들과 함께 누각을 올려 완성했다. 일제강점기에 문루가 망가졌다가

1975년 문을 남쪽으로 옮겨 문루와 함께 복원했다.

원래의 위치는 지금의 도로가 있는 자리였다.

도로확장으로 성문의 한쪽 성곽이 짤려나간 채

초라하고 아픈 모습으로 한쪽으로 밀려난 광희문은

 성문 이름과는 달리 서글픈 과거를 가지고 있다.

 

 

 

 

시구문(屍軀門)이였던 광희문

 

광희문을 수구문(水口門)이나 상여가 나가는 문이라고 해 ‘주검 시(屍)’자를 넣어 시구문(屍軀門)이라고도 불렀다.

 광희문에는 도성의 시체 행렬이 종종 통과하곤 했다. 그 이유는 도성의 장례행렬이 통과할 수 있는 문이

 사소문(四小門)중에서도 소의문과 광희문밖에 없었기 때문(창의문은 산에 있는데다 출입이 불편했고,

혜화문은닫혀있는 숙정문을 대신해 북문으로 쓰였다)이다. 특히 광희문 밖 일대에는

공동묘지가 크게 자리하고 있었고 무당들이 많이 살아 ‘신당(神堂)’이라 부르던 것을

 구한말 신당(新堂)이라 고쳤는데, 이곳이 오늘날의 신당동이다.


 

 

 

서글픈 역사와 함께한 광희문

 

서글픈 역사와 함께한 광희문에 병자호란 때는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기 위해 황급히 이 작은 문으로 빠져나갔다

또한 1880년대 후반 서울에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는 이 성문 밖에 전염된 사람들이 산 채로 버려져 마치 생지옥을 연상케 했다.

1907년에는 일제가 강제로 군대를 해산하면서 이에 불복한 한국군의 저항으로 시내 곳곳에서 시가전이 벌어졌다.

 일제는 남대문 인근의 큰 접전에서 사망한 한국군 시신 120여 구를 모두 광희문 밖에 늘어놓고는 가족들이 찾아가 묻으라고 했다.

 이에 광희문 앞에선 며칠간 통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듯 광희문은 처절한 고난의 역사를 함께 해왔다.

조선시대 '수구문 돌가루'라고 하여 이 광희문의 돌을 갈아 만든 돌가루가 만병통치약으로 통했었다.

그렇지만 이는 '아무리 지독한 병마라도 수많은 원귀에 단련된 수구문에는 꼼짝도 못 할 것'이라는 상상력이 만든 미신이다.


 

 

 

 

 

 

 

 

 

 

 

 

 

 

 

 

광희문

서울특별시 중구 광희동2가 105

2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