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백제시조인 온조왕을 모신 사당, 숭렬전 (崇烈殿)

2012. 2. 13. 17:19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가지정 문화재

백제시조인 온조왕을 모신 사당, 숭렬전 (崇烈殿)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호

 

 

조선 인조 16년(1638)에 지은 사당으로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모시고 있다. 뒷날 남한산성을 쌓을 당시 총책임자였고 병자호란(1636) 때 싸우다 죽은 이서의 위패를 함께 모셨다. 원래 건물 이름은 ‘온조왕사’였으나 정조 19년(1795)에 왕이 ‘숭렬’이라는 현판을 내려 숭렬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정조대왕의 꿈에 온조왕이 나타나 정조의 인품과 성업을 칭찬하면서 혼자 있기가 쓸쓸하니 죽은 사람 중에서 명망있는 신하를 같이 있게 해달라고 하였다. 이에 정조는 남한산성을 쌓은 공로자인 이서를 같이 모시게 했다고 한다.

 

이 사당은 백제(百濟)의 시조인 온조왕(溫祚王)을 모신 곳이다. 본래 조선(朝鮮) 인조(仁祖) 16년(1638)에 온조왕사(溫祚王祠)로 건립한 건물인데 정조(正祖) 19년(1795)에 왕께서 사액(賜額)을 하사 숭렬전(崇烈殿)으로 바꾸었다. 인조(仁祖) 4년(1626) 수어사(守禦使)로서 남한산성의 수축에 힘쓰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남한산성에서 적과 싸우다 병사한 이서(李曙)를 함께 배향(配享)하고 있다. 글출처~문화재청

 

 

 

 

 

온조왕(溫祚王)

백제의 건국시조[생몰년: ?∼28(다루왕 1), 재위: 서기전 18∼서기 28].

온조(溫祚)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위례성(慰禮城)에 토대를 둔 백제 왕실의 시조이다. 현존 문헌들에는 백제의 시조로 전하는 인물들이 온조, 비류(沸流), 구태(仇台) 등 여러 명이며, 온조는 그 중의 하나이다. 백제 초기에는 북쪽에서 한반도 중서부 일대에 남하한 부여족의 여러 집단들이 연맹체를 결성하고 있었다.

그들 중 연맹체를 주도한 대세력으로는 먼저 미추홀(彌鄒忽: 현재의 인천 부근으로 추정)에 웅거한 집단이며, 뒤이어 패권을 잡은 것이 위례성(현재의 서울 風納土城 또는 경기도 廣州 부근으로 추정)의 집단이었다. 미추홀에서 일어난 집단의 시조로 전하는 것이 비류이고, 그 뒤에 권력을 장악한 위례성집단의 시조가 바로 온조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등에는 온조의 아버지를 동명(東明)이라 하는 한편, 동명을 백제의 시조라고도 하였다. 현존 문헌들에 의하면, 북부여(北扶餘)·고구려(卒本扶餘라고도 함)·백제(南扶餘라고도 함) 등 부여족 사회들은 모두 동명을 시조라 하고, 그를 숭배하는 제전(祭典)을 각기 가지고 있었다. 온조의 아버지가 동명이라 하는 것도 그러한 부여족 일반의 상황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의 건국설화가 다양하고 그 건국시조에 대한 이견(異見)이 많은 것은 그만큼 백제를 형성한 지배집단의 계통이 복잡하다는 방증이다.또한 온조와 비류가 형제라고도 하였다. 이는 두 집단의 연맹관계를 형제의 관계로 강조하기 위해 만든 연맹설화(聯盟說話)의 구성에서 오는 것으로 보인다. 비류가 형으로 기록된 것은 초기 에는 온조계 집단보다 비류계 집단의 세력이 우월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위례의 온조계 세력이 위례지역의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후기에 와서는 비류계 집단을 포섭하여 연맹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온조계 집단이 비류계 집단을 아울렀던 시점은 서기전 18년이었다는 견해와 온조왕 치세 어느 시기였다는 견해, 온조왕대가 아니라 한참 후대의 시기였다는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온조왕은 백제의 성장을 위협하는 낙랑군(樂浪郡)의 사주를 받은 말갈(靺鞨)의 침공을 수 차례 막아냈다. 또한 마한(馬韓) 영역의 일부를 복속시켜서 일련의 정복사업을 마무리했고 낙랑군 침공계획을 세우기까지 했다. 백제는 주변의 낙랑·말갈·마한 등 외부 세력의 압력을 효율적으로 방어하고, 새로 편입된 지역을 원활하게 통제하기 위한 지방통치구획으로 부(部)를 설치했다.

하지만,『삼국사기』등에 온조왕 치세(治世)의 일이라고 한 것들의 상당한 부분은 실제로는 백제의 발전과정에서 점차적으로 이루어진 일들을 소급해놓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이를테면, 온조왕대에 마한지역 전체를 통합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마한 전체를 정복한 것은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의 일이다. 또한 백제연맹체의 주도권이 미추홀 왕족으로부터 위례성 왕족에게 넘어간 것이 온조왕대였다는 것도 의문의 여지가 있다. 연맹장의 역할을 넘어서는 강력한 왕권이 확립되는 것도 온조왕대에서 훨씬 후대인 고이왕(古爾王)대에나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이러한 견해에 반하여 최근 풍납토성의 발굴 성과에 힘입어 온조왕 치세의 업적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려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이서 (李曙)  

1580(선조 13)∼1637(인조15).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인숙(仁叔), 호는 월봉(月峰). 효령대군(孝寧大君)의 7대손이며, 풍덕군수 광윤(光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위장(衛將) 간(幹)이고, 아버지는 목사 완령부원군(完寧府院君) 경록(慶祿)이며, 어머니는 감찰 이학증(李學曾)의 딸이다.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해 행사용(行司勇)·진도군수 등을 지냈다. 1618년(광해군 10) 대북파에서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무인으로서 그 만이 정청(政廳)에 불참하였다. 그 뒤 장단부사로 경기방어사를 겸했고, 1623년 인조반정 때 김류(金瑬)·이귀(李貴) 등과 함께 공을 세워 호조판서에 승진되고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었으며 완풍군(完豊君)에 봉해졌다.

이어 경기관찰사로 전임했는데,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나자 관찰사로 부원수(副元帥)를 겸해 적을 추격, 송도(松都)에 이르렀으나, 여러 가지 어려운 사정으로 요해처에 웅거한 채 출전하지 못해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곧 다시 서용되어 완풍군에 봉해졌다.

이어 총융사(摠戎使)로서 왕에게 건의해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군량을 많이 확보했으며, 삼혈총(三穴銃 : 砲身이 세 개가 겹쳐있는 총)과 조총(鳥銃)을 많이 제조해 적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인조는 그의 공을 높이 평가해, 경연(經筵) 특진관(特進官)으로 삼아 국방 문제를 항상 상의했다 한다. 1628년 형조판서를 거쳐 1632년에는 특명으로 공조판서가 되어 각처에 산성을 수축해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1634년 판의금부사를 겸했고, 1636년 병으로 일시 사직했다가 곧 훈련도감제조를 거쳐 병조판서로 기용되어 군비를 갖추는 데 힘썼다. 이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어영제조(御營提調)로 왕을 호종하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지키다가, 이듬 해 정월에 적군이 겹겹이 포위하고 항복을 재촉하는 가운데 과로로 순직하였다.

무신으로 최초로 병조판서가 되었다. 독서를 좋아했고 효성이 지극했다 한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또한 그는 남한산(南漢山)의 형세를 살핀 후 백제가 고구려와의 전투시에 이곳을 도읍으로 삼은 뜻을 읽고 인조에게 건의해 산성을 수축케 하였다. 이러한 공으로 남한산성의 온조왕묘(溫祚王廟)와 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화포식언해 火砲式諺解≫와 ≪마경언해 馬經諺解≫가 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숭렬전 (崇烈殿)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호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717

경기도 광주시 문화공보과 031-760-4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