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가 당대에는 역적이지만 후대에는 충신이 될 것이라 말한 사육신묘

2012. 2. 14. 06:30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가지정 문화재

세조가 당대에는 역적이지만 후대에는 충신이 될 것이라 말한 사육신묘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8호)

 

 

한강대교와 노량진역 사이의 언덕에 있는 사육신묘는

일대 4만 9401㎢의 면적을 성역으로 가꾸어 문을 연 공원이다.

사육신묘는 조선 제6대 왕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은 세조에 반대해

단종복위를 꾀하다 들켜 죽은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김문기 등의

 일곱 충신을 모신 곳이다. 묘역 앞에 있는 사당 의절사에서는

이들 7명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10월 9일에 추모제향을 올린다.

 

 

 

 

 

사육신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1445년)으로부터 왕위를 빼앗고, 왕이 되자 이에 불복하고 단종 복위에 힘 쓰다 목숨을 잃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에 추가로 김문기를 현창하여 모신 곳이다. 이들은 단종 3년(1455년)에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분개하여 단종의 복위를 노리던 중, 1456년 6월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에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과 유응부가 세조 일파를 처단하기로 계획하였으나, 이 사실이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이들의 계획이 좌절되자 거사 동지이며 집현전 출신인 김질(金礩) 등이 세조에게 단종복위 계획을 밀고하여 연루자들이 모두 붙잡혔다.

성삼문은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를 꿰고 팔을 잘라내는 잔혹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세조를 ‘전하’라 하지 않고 ‘나리’라 불렀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진상을 자백하면 용서한다는 말을 거부하고 형벌을 받았다.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는 단근질로 죽음을 당하였고, 하위지는 참살 당하였다.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자기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하였고, 김문기(金文起)도 사지를 찢기는 참혹한 형벌을 받아 사망하였다. 이밖에 사육신의 가족으로 남자인 경우는 모두 죽음을 당하였고, 여자의 경우는 남의 노비로 끌려가는 등 70여명이 모반 혐의로 화를 입었다.

 

 

 

 

 

 

사육신묘역과 공원조성

사육신의 충성심과 장렬한 의기를 추모하고자 숙종 7년(1681년)에 민절서원을 세웠고, 정조 6년(1782년)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전해오다가, 1955년 5월에 육각의 사육신비를 세웠다. 1978년 서울특별시에서는 이들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영혼을 위로하고 그 정신을 널리 현창하고자 3,240평이었던 묘역을 9,370평으로 확장하고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의절사(義節祠), 불이문(不二門), 홍살문, 비각(碑閣)을 새로 지어 충효사상의 실천도량으로 정화하였다.

입구에 홍살문이 있고, 그 안 좌우로 신도비와 1955년에 세운 육각비가, 불이문을 들어서면 의절사가 있으며, 각종 편의시설도 구비되어 있다.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개방하고 있다. 매년 10월 9일에 위패를 모시고 추모제향을 올린다.

 

 

 

 

사육신 사후

사육신 일족 중 후손이 생존하고 있는 집안은 박팽년가와 하위지가문이 있다. 하위지의 조카 중 하포, 하박, 하원 등은 미성년자라서 처형되지 않았고, 박팽년의 며느리 이씨는 자신이 낳은 아들과 박팽년가의 노비로 함께 끌려온 여종의 딸을 바꾸어서 자신의 딸이라 주장하여 아들을 살렸다. 아들 박비는 성종 때에 자수하여 특별히 사면되고 박일산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사육신의 시신이 매장된 뒤 세조는 이를 보고 당대에는 역적이지만 후대에는 충신이 되겠다고 한탄한 바 있다. 한편 사육신의 편에서 세조의 편으로 전향한 신숙주, 김질, 정인지는 배신자의 상징처럼 여겨져 비판과 지탄,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사육신은 사후 중종 때 가서야 복권의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현종송시열, 김수항 등이 사육신의 복권을 청하는 상소를 계속 올려 영조, 정조 때에 관작이 복구되고 증직과 시호가 내려졌다. 1782년 정조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박팽년을 추모하여 노량진에 조선육신 이라는 신도비를 세워주었다. 추후, 박정희 정권 때 국사편찬위원회에 의해 김문기를 기존 사육신에 추가로 현창하였다. 김문기의 가문은 현재 다수가 생존하고 있다.

 

 

 

 

 

사육신 시신의 매장

사육신의 시신은 누가 매장하였는지 정확하게 알려져있지 않다. 통설에 의하면 매월당 김시습이 비밀리에 사육신의 시신을 한강변에 매장했다고 한다.

비밀리에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한 이는 어느날 야밤에 성삼문, 하위지, 유응부, 유성원, 이개, 박팽년의 시신과 박팽년의 형제들과 부친 박중림, 성삼문의 형제들과 성승의 시신을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노량진에 안장하였다.

이때 박팽년의 형제들과 부친을 근처에 묻고 박씨지묘라는 비석을 따로 더 세웠고, 성삼문의 형제들의 시신을 성삼문 묘 근처에 묻고, 성승의 묘는 성삼문의 묘의 앞쪽 혹은 뒷쪽에 묻고 성씨 지묘 라고 쓴 비석을 두 기를 더 세웠다.

그러나 후일 성승의 묘로 전하는 묘소는 실전되었고, 후대에 충청북도 홍성군성승 장군과 그보다 앞서 사망한 본부인의 묘소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성승의 묘소에 실제 성승의 시신이 있는가 여부는 불투명하다. 근처에는 성삼문의 생가와 사육신 사건 이전에 사망한 성삼문의 본부인 묘소도 있다.

 

 

 

 

 

 

 

 

사육신묘역

현재 이곳에 여섯이 아닌 일곱 분의 묘가 조성되어 있는 경위는 다음과 같다. 세조 2년 단종복위사건 가담자들의 참혹한 죽음 이후, 어느 스님이 성승ㆍ박팽년ㆍ유응부ㆍ성삼문ㆍ이개 다섯 분의 시신을 현재의 위치에 모셨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2년 6월 병오(丙午)조에는 성삼문ㆍ하위지ㆍ이개ㆍ유성원ㆍ김문기ㆍ박팽년을 비롯한 성승ㆍ유응부 등의 이름이 보이고,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에는 성삼문ㆍ박팽년ㆍ이개ㆍ유성원ㆍ하위지ㆍ유응부를 사육신이라 하였다. 그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성승의 묘를 찾을 수 없어 네 분의 묘만 있었으나, 여전히 사육신묘라 불렸다.

이리하여 서울특별시가 사육신묘 일대를 성역화하면서 육신에 대한 논란을 조정하였는데, 그 결과로 사육신묘에는 일곱 분의 묘가 모셔지게 되었다. 즉 본래 이곳에 있던 박팽년ㆍ성삼문ㆍ유응부ㆍ이개의 묘에, 하위지ㆍ유성원ㆍ김문기의 가묘(假墓)를 새로이 만든 것이다. 의절사 내의 위패와 마찬가지로 그 뒷편의 묘소는 동쪽으로부터 김문기ㆍ박팽년ㆍ유응부ㆍ이개ㆍ유성원ㆍ성삼문ㆍ하위지 순서로 모셔져 있다.

 

 

 

 

 

 

 

사육신 신도비

 

 

 

 

사육신역사관

사육신역사공원내에 지하 1, 지상 2층, 연면적812.64㎡ 규모 단종충신 역사관을 건립, 역사관에는 영상실, 홍보관과 전시실 등 단종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들의 유교적 충절정신을 기리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단종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상과 기록물 등을 감상하고 충신들에게 행해진 고문을 살피고 체험할 수 있다. 현재 내부시설물 보완작업으로 휴관중에 있다


 

 

 

 

 

 

 

사육신공원내에는 고양이들이 너무많았습니다. 

오래전부터 터를잡고 살아온듯 사람을 보아도 피하지도 않습니다.

 

 

 

 

사육신묘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1동 155-1

02-813-2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