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15. 05:45ㆍ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가지정 문화재
[서울 문화재탐방] 서울 탑골공원 (서울 塔골公園) 사적 제354호
원각사는 고려 때 흥복사라 불린 절로, 조선 전기에 절을 넓히면서 원각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불교를 억누르는 정책으로 인해 연산군과 중종때 절이 폐사되었다.
그 후 영국인 브라운의 건의로 이곳에 서양식 공원을 세웠으나, 그 이유와 시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공원 안에는 원각사지 10층석탑(국보 제2호)과 원각사비(보물 제3호)가 있다.
또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팔각정·독립만세 부조판·손병희 선생의 동상들도 있다.
1919년 3월 1일 처음으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3·1운동의 출발지로서, 우리 민족의 독립 정신이 살아 숨쉬는 유서 깊은 곳이다
.
절터에 세운 서울 최초의 근대공원
이 곳은 조선 원각사< 圓覺寺 > 절터에 세운 서울 최초의 근대공원이다. 원각사는 조선 제6대 세조< 世祖 >의 명에 의해 동왕 10년 (1464)에 고려 때부터 내려오던 흥복사< 興福寺 >의 옛터를 넓혀 건립한 사찰로 조선 초기에는 조계종 본사로 번성하였다. 그러나 조선조의 억불책으로 연산군< 燕山君 >과 중종< 中宗 > 때 절을 폐지하고 건물을 헐어버려 폐허가 되었다. 그 후 대한제국 광무원년< 光武元年 >(1897) 탁지부< 度支部 >(지금의 재무부)에 고문으로 와 있던 영국인 브라운의 건의로 이곳에 서구식의 공원을 건립하고 이곳에 남아 있던 원각사 탑의 이름을 따 탑골(파고다)공원이라 하였다. 특히 이 공원은 1919년 3월 1일 처음으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기미 3·1 운동의 발생지로서 우리 민족의 독립 정신이 살아 숨쉬는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현재 공원 경내에는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보물 제3호인 원각사비 등 귀중한 문화재를 비롯하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팔각정, 그리고 독립운동 부조판, 손병희선생 동상 등 많은 기념물이 있다. 1979년 기미 3·1운동 60주년을 맞이하여 공원을 넓혀 정비하였고 1991년 10월 25일 이 공원을 사적 제354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의암 손병희 선생 상 (義菴 孫秉熙 先生 像)
손병희(孫秉熙, 1861년 4월8일~ 1922년 5월 19일)는 천도교(동학) 지도자이자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밀양이다. 본래 이름은 손응구(孫應九)이며, 망명 중 사용한 가명은 이상헌(李祥憲),
최시형에게 받은 도호(道號)는 의암(義菴)이다. 사후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서울 원각사지 대원각사비 (서울 圓覺寺址 大圓覺寺碑) 보물 제3호
원각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비로, 조선 성종 2년(1471)에 건립되었다. 원각사는 탑골공원 자리에 있던 절로서 조선시대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조계종의 본절로 세웠다. 조계종이 없어지자 관아로 사용되다가 세조가 간경도감에서『원각경 (圓覺經)』을 번역하고, 회암사 사리탑에서 사리를 나누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에 다시 원각사를 짓고 13층 사리탑을 세웠다.
비는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몸돌 위를 두 마리의 용이 감싸듯 표현되어 있어 복고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비를 지고 있는 돌거북은 둔중한 몸체로 머리는 목을 표현하지 않고 앞으로 나와 있다. 등무늬는 육각형이 아닌 사다리꼴 평행세선을 새겼으며, 등 중앙에는 연잎조각을, 꼬리와 다리에는 물고기 비늘을 조각해 놓아 조선시대 조각미의 독특한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비몸돌 위로는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드는 두 마리의 용이 조각되었으며, 조각 아래의 가운데에는 ‘대원각사지비 (大圓覺寺之碑)’라는 비의 이름이 강희맹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비문은 당대 명신들이 짓고 썼는데, 앞면의 비문은 김수온, 성임, 뒷면의 추기는 서거정, 정난종이 각각 짓고 썼다.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 (서울 圓覺寺址 十層石塔) 국보 제2호
이 탑은 조선시대의 석탑으로는 유일한 형태로, 높이는 약 12m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탑 구석구석에 표현된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탑을 받쳐주는 기단(基壇)은 3단으로 되어있고, 위에서 보면 아(亞)자 모양이다. 기단의 각 층 옆면에는 여러가지 장식이 화사하게 조각되었는데 용, 사자, 연꽃무늬 등이 표현되었다. 탑신부(塔身部)는 10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자 모양을 하고 있고 4층부터는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각 층마다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지붕, 공포(목조건축에서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위에 얹는 부재), 기둥 등을 세부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구조 등이 고려시대의 경천사지 10층석탑과 매우 비슷하여 더욱 주의를 끌고 있다. 탑의 윗부분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세조 13년(1467)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형태가 특이하고 표현장식이 풍부하여 훌륭한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원각사지 십층석탑
원각사지 십층석탑은은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석탑으로는 유일한 형태이며 높이는 약 12m 이다. 3중의 기단(基壇)은 평면이 아자형(亞字形)을 이루고 있으며 탑신부(塔身部)는 3층까지는 기단과같은 평면이고 4층부터는 방형(方形)으로 되어 있다. 각 면석(面石)은 용(龍) 사자(獅子) 모란(牡丹) 연꽃(蓮華) 불상(佛像) 보살상(菩薩像) 나한상(羅漢像) 천왕상(天王像) 등으로 빈틈없이 새겨져 있으며 또한 탑신부에는 각 층마다 난간(欄干) 둥근기둥 다포계(多包系)의 공포(공包) 기와지붕 등이 새겨져 다포계 목조건물(木造建物)의 세부수법을 충실히 모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일대는 조선(朝鮮) 세조(世祖) 11년(1465)에 세운 원각사의 터이며 원각사는 연산군(燕山君) 때 폐사(廢寺)되어 현재 이 탑과 비(碑)만 남아 있다.
탑골공원팔각정 (塔골公園八角亭)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제73호
조선 고종(재위 1863∼1907) 때 영국인 브라운이 조성한 현대식 공원으로
공원 안에 있는 원각사 10층 석탑으로 인하여 파고다공원 또는 탑동공원이라 불리웠으며,
이때 팔각정도 함께 지었다. 황실공원으로 제실, 음악연주 장소 등으로 사용하였으며,
1913년부터는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 학생들과 시민이 이 앞에 모여
학생대표의 독립선언문 낭독에 이어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시위 행진을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일제시대에는 시민들이 울적해진 심정을 달래기 위하여 이곳을 많이 찾았다고 한다.
앙구일구 대석
조선시대 해시계인 앙구일구를 받쳤던 돌받침으로
대한제국 시기에 종로 전차궤도 공사로 받침돌만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천도교 측에서는 손병희(孫秉熙), 권동진(權東鎭), 오세창, 임예환(林禮煥), 나인협(羅仁協), 홍기조(洪基兆), 박준승(朴準承), 양한묵(梁漢默), 권병덕(權秉悳), 김완규(金完圭), 나용환(羅龍煥), 이종훈(李鍾勳), 홍병기(洪秉箕), 이종일·최린(崔麟) 등 15명이 선정되었다. 그리스도교측에서는 이승훈(李昇薰), 박희도(朴熙道), 이갑성(李甲成), 오화영(吳華英), 최성모(崔聖模), 이필주(李弼柱), 김창준(金昌俊), 신석구(申錫九), 박동완(朴東完), 신홍식(申洪植), 양전백(梁甸伯), 이명룡(李明龍), 길선주(吉善宙), 유여대(劉如大), 김병조(金秉祚), 정춘수(鄭春洙) 등 16명이 선정되었다. 불교측 대표로는 한용운(韓龍雲)과 백용성(白龍城)이 서명·날인했다.
서울 탑골공원 (서울 塔골公園) 사적 제354호
서울 종로구 종로 99 (종로2가)
02-731-0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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