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문화의 중심,등록문화재 정독도서관

2012. 2. 19. 06:00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가지정 문화재

 

북촌문화의 중심,정독도서관

 

서울시민에게 최신의 정보를 제공하고, 교양·학습 등을 지원하여 문화발전 및 평생교육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서울시는 1976년 1월 경기고등학교를 인수하고 1977년 1월 4일 개관하였다. 1985년 8월 1일 족보자료실을 개실하고 1989년 4월 7일 도서관운영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994년 2월 25일 국립중앙도서관과 네트워크로 운영되기 시작하였으며, 1995년 6월 15일 서울교육사료관을 개관하였다.
1995년 7월 24일 중국연변자치주 연변도서관과 결연을 체결하고 1996년 9월 25일 도서관협력망 서울지역 대표도서관으로 지정되었다. 1996년 10월 8일 멀티미디어실을 개설하고 1997년 5월 2일 일본도립중앙도서관과 결연을 체결하였다. 1997년 5월 15일 다이얼업 검색, 1997년 6월 30일 인터넷 자료검색을 개통하였다. 1998년 3월 7일 취업정보도움방을 개실하고 1999년 3월 31일 한국도서관상 공적상을 수상하였으며, 2000년 6월 19일 장애인실을 열었다.

경기고등학교였던 정독도서관 건물과 서울교육박물관 건물은 등록문화재이다.

 

 

 

 

 

 

 

경기고등학교(京畿高等學校)

경기고등학교(京畿高等學校)는 현재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1동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로, 1900년 개교하였다. 이름과는 달리 서울특별시에 위치하고 있다. 대한제국 시기인 1899년 4월 4일 칙령 제11호로 중학과 심상과 4년, 고등과 3년 관제가 공포되었고, 1900년 10월 3일 신학제에 의하여 관립중학교(수업연한 7년, 4년간 심상과)가 현재의 종로구 화동(花洞) 2번지에 개교되면서 한국 최초의 중고등학교가 개교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교장이 재임하기도 했다.(7~14대 교장)

1976년에 정부의 강남 개발 시책에 따라 종로구 화동에서 강남구 삼성동 현 위치로 이전하였고, 학교의 옛터는 정독도서관으로 되었다.

 

 

 

 

유서깊은곳, 북촌의 관광명소가된 정독도서관

정독도서관 마당의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 앞의 잔듸밭은 갑신정변의 풍운아 김옥균의 집터이고, 정선이 인왕제색도의 구도를 잡은 곳이라고 해서 기념비가 세워졌다. 광해군 때 총포를 만들던 '화기도감'이 이곳에 있었고, 1938년 냉·난방시설을 갖춘 최신식 교사이자 근대 교육의 발상지인 경성제일고보(경기고)가 세워졌다. 흥선대원군이 권력의 기반으로 삼아 세상을 호령했던 '종친부'(서울시 유형문화재 9호)가 도서관 왼편에 자리한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이 살았고, 도서관 뒤편 언덕에는 청백리로 유명한 맹사성이 살았다. 유서 깊은 땅이라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호

조선왕조 역대 모든 제왕의 어보(왕의 도장)와 영정(초상화)을 보관하고, 왕과 왕비의 의복을 관리하며 종실제군(宗室諸君)의 봉작승습·관혼상제 등 모든 사무를 맡아보던 곳이다. 조선 전기에는 ‘재내제군소’라 하였으나 여러 차례 그 명칭과 기능이 바뀌었다가, 세종 12년(1430)에 종친부라 하였다.
순종 융희 1년(1907)에는 이를 폐지하고, 이곳 사무를 규장각으로 옮겼다.
원래 삼청동에 있던 것을 1981년 현 위치로 옮긴 것이다. 
  조선왕조< 朝鮮王朝 > 역대< 歷代 > 모든 제왕< 帝王 >의 어보< 御譜 >와 영정< 影幀 >을 보관하고 왕과 왕비의 의복을 관리하며 종실제군< 宗室諸君 >의 봉작< 卦爵 > 승습< 承襲 > 관혼상제< 冠婚喪祭 > 등의 사무를 집행하던 곳이다. 고종< 高宗 > 원년< 元年 >(1864) 종부시< 宗簿寺 >를 합하였고, 고종 31년(1894) 정치제도 개혁 때 종정부< 宗正府 >라 개편하였으며, 광무< 光武 > 9년(1905)에는 종부시로 다시 고쳤다가 순종< 純宗 > 융희< 隆熙 > 원년(1907)에 이를 폐지하고, 이곳 사무를 규장각< 奎章閣 >으로 옮겼다. 원래 삼청동< 三淸洞 >에 있던 것을 1981년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글출처~ 문화재청

 

 

 

종친부(宗親府)

종친부(宗親府)는 조선시대 국왕을 지낸 이의 족보와 얼굴 모습을 그린 영정을 받들고 국왕 친척인 왕가·종실·제군의 계급과 벼슬을 주는 인사 문제와 이들간의 다툼 등에 관한 문제를 의논하고 처리하던 관아였다.

옛 경기고등학교 자리인 정독도서관 관내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 때 제군부를 세종 15년에 고친 이름으로 조선말 1905년 종부사로 이름을 고쳤으나 2년 후에 폐지되어 그 업무는 규장각으로 옮겨졌다.

종친부 건물은 조선 시대 관아 건축에 해당한다. 원래 경복궁 동쪽 문인 건춘문 맞은 편 옛 수도육군병운 후원인, 한성부 북부 관광방에 그 일부분만이 남아 있었는데, 1981년 현 위치로 옮겼다. 종친부가 이곳에 위치했던 것은 종신과 외척 및 부마·인척, 그 외에 궁에서 일을 보는 상궁들만 건춘문으로 드나들게 했던 궁궐의 제도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종친부 옆에는 의빈의 인사 문제를 관장하는 의빈부가 있었다. 의빈이란 왕의 부마, 즉 왕비의 소생인 공주와 후궁의 소생인 옹주의 남편 되는 사람을 말한다. 이들 의빈들도 왕족 대우를 받았으므로 그들이 모여 의논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곳으로 종친부 옆에 의빈부가 마련되었었다.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조선 말기의 왕족이자 정치가, 화가이며 대한제국의 황족, 추존왕이다. 이름은 이하응(李昰應)이다. 부인은 여흥부대부인 민씨이다. 남연군(원래는 인편대군의 6대손이나 후에 양자 입적)과 군부인 민씨의 넷째 아들이며, 고종황제(高宗皇帝)의 친아버지이다. 1863년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섭정하며 안으로는 유교의 위민정치를 내세워 전제왕권의 재확립을 위한 정책을 과단성 있게 추진하였고, 밖으로는 개항을 요구하는 서구 열강의 침략적 자세에 대하여 척왜강경정책으로 대응하였다.또한  서원을 철폐하여 양반·기득권 토호들의 민폐와 노론의 일당독재를 타도하고 남인과 북인을 채용하였으며, 동학과 천주교를 탄압하였다.

1863년 12월부터 1874년 11월까지 조선의 섭정이었다. 직접 며느리 명성황후를 간택]하였으나, 도리어 명성황후에 의해 권좌에서 축출된다. 1874년 11월 명성황후와 유학자 및 안동 김씨, 풍양 조씨, 여흥 민씨 등에 의해 축출된 이후 명성황후와 권력투쟁을 벌였다. 일본인과 결탁하여 며느리 명성황후의 암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유길준에 의하면 대원군은 민비를 제거해 달라고 일본 공사관에 수시로 부탁했다고 한다. 명성황후와 민씨 일족 및 고종을 폐출하고 흥친왕, 이재선 등을 조선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손자 영선군 이준용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여러 번 정변을 기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했다. 을미사변의 조선인 주요 협력자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쇄국정책과 천주교도 대량 학살, 학우조비선의 실패, 무리한 경복궁 중건 과정, 일본에 명성황후의 제거를 청탁한 점 등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성 출신으로 자는 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해동거사(海東居士)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907년 10월1일 대원왕(大院王)으로 추봉되었고, 헌의(獻懿)를 시호로 받아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이 되었다.

 

 

 

 

김옥균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은 조선후기의 문신, 정치인, 작가이며 구한말의 정치가·혁명가로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우(古遇), 별호는 고균(古筠)이며, 시호는 충달(忠達), 본관은 (신)안동이다. 인조때 우의정으로 지낸 문충공 김상용의 10대 손이다.

1870년(고종 8년) 초부터 유대치, 박규수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이동인 등을 만나 개화사상을 갖게 되고, 1872년(고종 10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이후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의 문물을 시찰하고 돌아왔으며 일본유학생 파견과 군사 견습생 파견운동을 주도하였다.

급진개화파로서 1884(고종 22년) 갑신정변을 주도하였다. 갑신정변 실패 이후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피신하여 망명생활을 지냈으나, 여러 차례 테러위협에 시달리다가 청나라로 망명했다. 1894년 청나라 상하이 호텔에서 홍종우에 의해 암살당했다. 사후 시신은 부관참시되어 8도에 효수되었으나 1895년(고종 32년) 개화파 내각이 들어서면서 복권되고 순종 때 충달공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유대치, 박규수의 문인이다. 충청남도 출신

 

 

 

 

 

 

 

 

서울교육박물관

우리 나라 중등교육의 발상지인 경기고등학교 건물로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전시관에는 삼국시대의 교육기관에서 현대에 이르는 교육관련 자료가 전통기, 개화기, 민족저항기, 미군정기, 교육과정기, 서울시교육청의 어제와 오늘로 나뉘어 전시되어 있다. 개화기의 교과서와 풍금, 일제시대의 통지표와 졸업앨범, 검정고무신, 몽당연필, 등사판, 무시험 추첨기, 양은 도시락 등의 물품을 비롯하여 8·15광복후 첫수업 모습, 콩나물교실, 얼룩무늬 교련복을 입은 고등학생 모습 등의 사진자료를 볼 수 있다.

소장품은 개화기 교과서 외 도서류 3,888점, 1910년대 학적부 외 기록문서류 3,411점, 교구류 228점, 1970년대 교복 등 복식 738점, 기타 400여 점 등 총 8,670점이다. 전시 외에 연 4회에 걸쳐 관람홍보와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단체교육을 실시한다.


 

 

 

 

 

정독도서관

서울특별시 종로구 화동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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