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8. 17:00ㆍ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내 박물관
선사시대로의 시간여행 공주 석장리박물관
충청남도 공주시 장기면 장암리에 있는 구석기 유물 박물관으로 공주 지역의 구석기 문화의 역사적 가치를 지속적으로 보존하고 이를 발전적으로 계승하기 위하여 1999년 12월 건립하였다. 2005년 5월에 전시관을 박물관으로 변경하기로 하고 유물을 확보하여 2006년 2월 1종 전문박물관으로 등록하였다. 2006년 9월 26일 박물관의 부대 시설을 완공하고 개관하였다.
석장리 출토 유물의 전시와 구석기 문화에 대한 각종 교육과 학술 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선사 문화 체험 등 학생들이 고대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각종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실시하고 있다.
전시는 상설 전시, 기획 전시, 야외 전시로 나누어 실시하고 있다. 선사 문화에 대한 다양한 교육 자료를 제공하고, 교육 기관 및 학술 단체와 연계하여 각종 세미나와 강연을 개최하고 있다. 학생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어린이 그림 그리기 대회와 선사 퀴즈 대회, 생각하고 느끼는 박물관 수업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
2011년 11월 현재 선사시대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전시관, 선사공원,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 체험 공간 등을 갖추고 있다. 관장 아래 학예연구사 1명과 8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선사시대의 유적을 관람하고 직접 체험함으로써 선사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선사 유적과 문화를 보유하고 있는 지역으로서의 긍지를 가질 수 있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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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기시대 생활개관
구석기인들은 주로 나무열매나 뿌리 등을 채집하거나 동물을 잡아서 먹고 살았는데, 이 때 돌을 깨뜨려 만든 도구 또는 동물의 뼈나 뿔을 다듬어서 만든 골각기 등을 사용하였다. 이들 도구의 종류는 용도에 따라 다양한데, 사냥도구로는 주먹도끼, 찍개, 찌르개 등이 있으며, 요리도구로는 긁개, 밀개, 공구로는 새기개 등이 있다. 특히, 충북 단양의 수양개유적에서는 이러한 석기를 만들던 석기제작지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석장리에서 조사된 후기 구석기시대에 속하는 평지의 집자리는 비교적 상세하게 조사가 이루어짐으로써, 구석기인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생활하였는가를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집자리는 담을 쳐서 집을 바깥과 구별하고, 출입하는 문을 만들었으며, 기둥을 세우고 움막을 쳐서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였다. 그 안에 살던 사람의 수는 8~10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는데, 혈연관계에 있는 가족들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공동체생활을 하면서 집단적인 협동을 통해 동물을 사냥하고나 사나운 맹수 등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였을 것이다.
주거지 내부에서는 화덕자리가 조사되었는데, 화덕은 둥그스럼한 자갈돌 7개를 둘러 놓았다. 석장리인들은 불을 이용하여 요리를 하고, 추위도 막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집 앞에서는 잔격지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 석기를 만들던 곳이었음을 보여준다.
석장리 주거지에서는 고래를 땅바닥에 새긴 것, 물고기 머리를 둘을 떼고 선으로 새기고 눈을 둥글게 돌려 굼파기 한 것 등 예술작품으로 추정되는 유물들도 출토되어 구석기인들의 예술활동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비록, 공주지역에서 구석기시대 주거유적이 석장리에서만 조사되었지만, 당시 금강주변에는 석장리와 같은 생활유적들이 곳곳에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동굴유적인 반포면 마암리의 속칭 '용굴'이란 곳에서도 구석기시대의 생활흔적이 조사되었다. 이 동굴유적은 금강 남안, 계룡산 북쪽 산줄기 사면에 위치한다. 동굴은 높이 20m 가량의 위치에서 입구를 동쪽으로 하고 있으며, 굴 입구의 크기는 너비9m, 높이1m이었으나. 그 안은 길이 24m, 너비 7~12m, 높이 3m이며, 30~50cm 정도의 퇴적층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고 한다. 이 곳에서는 석영반암(石英斑岩)의 석재로 만든 찍개, 찌르개, 긁개 및 돌날형 박편 등의 석기가 출토되었는데, 석장리유적의 상층과 연결될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이 동굴유적은 석장리유적과 함께 공주지역에서 생활한 구석기인들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이외에도 공주시 시목동,소학동,장기면 금암리 등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수습되었는데, 이들 지역은 모두 금강과 인접한 곳이다.
이와 같이 공주지역은 다양한 구석기시대 유적이 존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존속시기도 구석기 전기부터 후기까지 지속되었다. 구석기인들은 수렵·채집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활동영역이 농경인들에 비해 매우 넓은데, 주 생활근거지는 대부분 물이 풍부한 강이나 호수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금강을 끼고 있는 공주지역은 구석기인들의 생활에 적합한 자연환경을 제공하고 있었을 것이며, 금강유역에 분포하고 있는 구석기유적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구석기 사람들은 수만년 동안 손을 이용하여 돌을 주 무기나 생활용구로 사용하였는데 자연석 그대로나 그것을 깨거나 떼어서 도구로 사용한 것이 고작이었으나 신석기에 이르러서는 그 돌을 가공하여 쓰임새에 맞도록 비교적 정교하게 만들어 돌과같이 지천에 널린 나무를 가공, 결합하여 사용하였다. 신석기인 들은 농경생활의 시작 외에 구석기인들과 마찬가지로 어로와 수렵 등 채집경제를 유지하였으나 낚시, 그물, 화살, 호미, 돌칼 등의 용구를 발명, 개선하여 어로, 수렵, 채취 시 적은 노력으로 보다 많은 목적물을 획득하게 된다.
신석기 시대에 이르러 발명 된 그물과 낚시는 어로생활에 혁명을 이루어 내었으며, 돌화살촉을 이용한 사냥법은 그야말로 효율적인 사냥을 할 수 있는 대 발명이라 할만 하다. 신체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던 구석기 시대와는 달리,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이처럼 기구를 통해 돌팔매보다 파괴력과 정확성을 한층 높이는 생활도구를 만들게 된다. 특히 돌팔매보다 더욱 강력하고 표적에 치명적인 파괴력을 가진 돌화살촉의 등장은 사냥감을 포획하는데 있어 효과적인 신석기 시대의 명품이라 할만하다.
이처럼 신석기 시대에 이르러 발명 된 그물과 낚시, 돌화살촉은 어로, 수렵생활을 크게 개선 시켰다. 특히 신석기 시대에 이르러 정착된 농경문화는 가히 혁명적으로 생활상의 양태를 바꾸어 놓아 씨족, 부족 등의 집단화를 가능케 하고 공동체 생활을함으로써 독창적인 문화를 창조하게 되었다.
신석기시대가 되면서 구석기시대의 수렵, 채집경제를 벗어나 농경이나 목축을 기반으로 한 안정된 정착생활을 영위하게 되고, 토기와 마제석기를 사용하고 직조기술을 개발하는 등 보다 발전된 단계로 이행하게 된다. 그러나 세계 모든 지역에서 같은 시기에 이와 같은 문화양상이 전계된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빗살무늬토기와 마제석기가 사용되었지만, 농경은 보다 늦은 시기에 시작되었다.
석장리박물관 전시관은 건축가 이응묵의 19--년 작품으로 외부에는 왼쪽은 석기 떼는 구석기인 동상과 석장리 출토 대표석기 5점의 모형, 오른쪽은 사냥하는 구석기인 동상과 반구대 암각화 모형, 그리고 중앙기둥에는 석장리를 상징하는 주먹도끼모형이 있다. 내부에는 구석기에서 청동기에 이르는 선사문화를 “자연, 인류, 생활, 문화, 발굴” 이라는 5가지테마로 전시연출한 상설전시와 일정한 주제를 중심으로 특별 전시 될 기획전시, 영상실, 기념품을 판매하는 뮤지엄샵 각종 정보검색과 쉴 수 있는 편의시설인 휴게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설전시는 크게 자연, 인류, 생활, 문화, 발굴이라는 5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구석기(전기,중기,후기)에서 중석기, 신석기, 청동기에 이르는 선사시대 전 범위와 세계 선사문화, 우리나라 구석기 문화, 금강유역 구석기 문화, 석장리 구석기 문화 등의 지역간 비교 전시방법 등을 통해 이해하기 쉽게 체계화시켜 선사문화를 총체적으로 느끼고 배울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인간은 동물분류학상, 척색동물, 포요강, 영장목, 사람과에 속하는데, 한마디로 걸어 다니는 포유동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주요 특징으로는 두발 걷기, 도구를 만드는 능력, 큰 뇌 등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처음 출현한 인류는 남쪽원숭사람(오스트랄로피테쿠스)을 시작으로 손쓴사람(호모하빌리스), 곧선사람(호모에렉투스)을 거쳐 슬기사람(호모사피엔스), 슬기슬기사람(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으로 진화되어 왔습니다. 제2 전시에서는 각 시기의 다양한 옛사람 머리뼈와 기타 두뇌용량, 그리고 현생인류 머리뼈 등을 비교전시하고 있습니다.
화석은 지질시대에 살던 동식물의 유해 및 유물이 퇴적암 따위 암석 속에 남아 있는 것을 말한다. 특히, 선사시대의 동물화석은 선사시대 환경과 옛사람들의 활동을 복원하는데 중요한 역활을 한다. 제1전시에서는 규화목, 공룡알 등의 중생대 화석, 심지마, 코뿔이뼈 등의 신생대 3기 화석, 맘모스 이빨, 검치호 등의 신생대 4기 화석, 그리도 다영한 현생종 동물뼈 등을 비교 전시하고 있다.
구석기시대의 생활상
석장리박물관은 구석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 (동굴 생활-곰 사냥-막집 생활-석기떼는 사람-열매 채집-풀뿌리 채집-물고기 잡이-벽화 그리기)을 디오라마로 구성 복원 전시함으로써 구석기 시대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선사 시대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몸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옷과 맛있게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먹거리, 추위를 막고 맹수들로부터 침입을 막을 수 있는 집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해결 되었을 때 그들은 예술 행위로서 무언가 남기고 표현하고자 하였을 것이고, 이는 많은 발굴과 연구를 통해서 밝혀졌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해결 하였는지 의ㆍ식ㆍ주ㆍ예술 등으로 분류하여 살펴보자.
옷은 처음에는 넓은 나뭇잎이나 풀을 엮어 몸을 보호하다가 사냥 기술의 발달로 짐승 가죽을 이용하여 옷을 만들어 입게 되었다.
먹거리는 중기 구석기 시대에는 맘모스, 코뿔이, 곰, 하이에나, 말, 멧돼지, 큰 꽃사슴등의 큰 짐승들을 덫이나 함정을 이용하여 사냥하거나 사냥돌, 주먹도끼, 찍개 등의 도구로 무리 사냥을 하였다. 후기 구석기 시대에 오면서 연모의 발달과 함께 사냥 방법도 발전해서 창과 같은 도구를 사용하여 사슴, 고라니, 토끼, 오소리와 같이 순하고 약한 짐승들을 사냥하기도 하였다. 또한 작살이나 낚시바늘을 이용 물고기 잡이도 하였으며, 나무열매나 풀뿌리도 채집하여 먹거리로 이용하였다.
집은 인류가 태어나서 처음에는 짐승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였을 것이다. 기후가 추워지면 동굴이나 바위그늘 같은 곳을 찾아 생활하다가 풍부한 먹거리를 찾아 이동하면서 들판이나 강가에 막집이나 움집을 짓고 머물며 살았음을 발굴을 통해 여러 유적에서 확인되었다.
구석기시대의 예술
동굴의 천정이나 암벽등에 천연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쪼으고 새기는 기법으로 말, 사슴, 맘모스 등 주로 사냥을 대상으로 하는 짐승들을 표현하였다. 이는 사냥꾼의 안전, 풍부한 사냥과 수확을 기원하는 바람과 소원의 표현일 것이다. 또한 짐승의 뼈나 사슴뿔에 조각을 하거나 그림을 새기는 예술 행위는 신앙의 깊은 뜻도 담겨 있을 것이다.
충북 제천 점말용굴에서 출토된 코뿔이 앞팔뼈에 눈과 입만 간단히 표현해서 사람 얼굴 모습을 새긴 예술품이 66,000년 전의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중기 구석기 시대부터 인류의 예술 행위가 있었음을 증명해주는 아주 중요한 유물이다.
청원 두루봉 2굴에서도 뼈에 사람 얼굴 모습을 새긴 예술품이 출토되었다. 눈과 입만 표현해서 사람 얼굴 모습을 나타낸 예술품들은 신석기 시대 동삼동 조개더미 출토 조가비 얼굴 모습, 청동기 시대 양평에서 출토된 얼굴 모습 흙단추 등 선사 기대의 전 시기에 걸쳐 출토되고 있다. 또한 바위에 쪼아서 새긴 청동기 시대 암각화가 울주 지방을 중심으로 천전리, 대곡리, 알터등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인류문화의 근간 돌
공주의 금강유역은 시대별로 구석기시대, 중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등에 이르는 선사시대와 고대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역사시대의 문화권이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다. 특히 선사문화는 금강유역을 중심으로 하여 일정한 문화권을 설정 할 수 있을 정도로 지역적 특징을 보인다. 금강은 공주지역에 정착한 선사시대 사람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삶의 보고(寶庫)였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금강은 이때의 사람들에게 주요한 영양 공급원인 물고기와 조개를 원하는 만큼 풍요롭게 내주었으며, 생존과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물을 풍부히 공급하는 생명의 젓줄 역할을 했다. 또 강은 흐르면서 범람을 거듭한 끝에 농경생활이 용이한 옥토를 만들어 내었으며 강 주변의 낮은 구릉사이의 분지로 사람들을 안내하여 공주지역 신석기시대 사람들로 하여금 농경을 통한 정착생활을 할 수 있게 했다.
이는 공주시 석장리의 구석기 유적과 공주시 정안면 장원리, 청양군 정산면 학암리 신석기시대 유적의 존재로서 그 반증이라 할 것이며, 이들 유적은 공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금강 하류역 일대에서 인류의 거주가 이루어진 시기를 구석기시대 까지 올려 놓은 반면에, 이후 전개되는 역사 속에서도 꾸준히 사람의 삶이 이루어져 왔음을 확인 할 수 있는 근거자료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공주에 존재하는 각 시대별 다양한 문화의 근간은 구석기 사람이 돌을 사용함으로서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석기시대는 구석기와 중석기, 신석기시대로 나누는데, 돌을 가공하여 생활을 영위하는 시대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 세 시기에 있어서 돌은 석기시대 사람들에게 신체적 열등성을 보강하는 재료(또는 도구 및 무기)로 사용되었으며 직립보행을 하게 됨으로써 자유로와진 두 팔을 이용하여 돌을 가공ㆍ사용함으로서 인류의 문화가 탄생하게 된다.
석기문화
석장리 선사 유적에서 발굴된 석기 및 자료를 중심으로 각 문화층 별로(전기-중기-후기-중석기-신석기-청동기) 석장리 문화를 복운 전시하고 발굴사 자료 · 금강유역-우리나라-세계각국의 구석기 문화도 비교 전시하였다. 석장리박물관은 석장리의 구석기 유적에 자리한 만큼 구석기 문화유산이 다량 출토 되었다. 석장리 유적에서는 전기, 중기, 후기 등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사용한 석기가 각 시기별로 고르게 발굴되어 그때의 석기문화를 짐작케 한다. 그러면 석장리에서 발굴 된 석기를 중심으로 구석기 시대의 유물과 석기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자.
구석기시대는 유인원에서 사람이 진화되어 연모를 만들어 쓴 때부터 농경이나 목축 또는 토기제작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문화단계로 약 250만년 전부터 1만년 전 사이에 해당된다. 이 기간은 지질시대 구분으로는 제4기 홍적세로 온 세계에 걸쳐 적어도 4번의 얼음강시대(빙하기)와 그 사이 3번의 따뜻한시대(간빙기, 또는 빙온기)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지역은 얼음강시대에도 그다지 춥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유적에서 발굴되는 짐승화석과 토양에 남아 있는 꽃가루 화석의 연구 결과로 알 수 있다. 한편 얼음강시대에는 바닷물 수위가 낮아져 중국이나 일본 지역도 걸어서 오갈 수 있었다.
구석기시대의 오랜 기간 동안 누가 주인공이었는가에 따라 곧선사람(Homo erectus)의 전기 구석기, 슬기사람(Homo sapiens)의 중기 구석기, 슬기슬기 사람(Homo sapiens sapiens)의 후기 구석기 시대로 나뉜다.
전기에는 자작돌의 한면만 떼어 날을 세운 외날찍게, 양면을 뗀 안팎날 찍게, 거의 전체를 다듬어 사용 효과를 크게 한 주멱도끼류와 긁게, 찌르게 등의 석기들이 쓰였다.
중기에는 석기 제작 기술이 보다 발달하였다. 즉 르발루아(Leviallois)수법처럼 만들려는 석기의 크기나 모양에 알맞은 격지를 쉽게 떼어내는 방법이 개발 되었다. 그리고 앞 시기보다 더 세련된 주먹도끼와 사냥돌, 긁게, 뚜르게, 톱날, 새기게 등이 사용 되었다.
후기에 이르면 뿔이나 뼈로 된 쐐기를 몸돌에 대고 힘을 주어 돌날을 떼내는 대고 떼기 수법과 이 방법으로 얻은 긴 돌날을 반듯하게 다듬는 수법이 발달한다. 후기 구석기 시대에는 이러한 돌날을 기본으로 삼아서 석기의 크기는 더 작아지고 정교해진다. 또 밀게, 새기게 같은 전문화 된 석기들이 만들어진다.
구석기 유적지의 발굴
한국역사의 시원은 선사시대의 시대별 분류 중 대개 유라시아에 대하여 사용되는 시대개념인 중석기시대로부터 시작 된다. 이 시대 인류의 생활 특징은 수렵, 어로, 채취 등 획득경제에 의존하여 생활하게 되는 데, 주로 강가를 중심으로 그 생활무대를 만들어 가고 있다. 이와 같은 중석기시대의 유적은 우리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그 것이 바로 공주석장리의 선사유적이다.
구석기시대의 생활은 주로 채집과 수렵에 의존하였다. 특히, 동물을 사냥하기 위해서는 집단적인 협동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일정 규모의 공동체 생활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사실은 석장리의 집자리유적이 8~10명 정도의 인원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점을 통해 증명되고 있다. 그러나 공동체 조직의 구체적인 모습은 잘 알 수 없다. 그리고 소박하지만 사람이나 동물을 조각한 유물이 보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구석기인들의 예술활동을 추측할 수 있는데, 이러한 활동은 주로 주술적인 신앙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공주지역에서 조사된 유적, 유물들을 통해 당시 이 지역에서 구석기인들이 어떠한 생활을 하였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유적의 존재는 1964년 5월 홍수에 의해 강둑이 무너짐으로써 확인되었으며,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는 1964년 11월 22일에 처음 이루어진 이후 1974년까지 10년간에 걸쳐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1990년과 1992년에 11,12차 조사가 추가로 실시되었다. 그 결과, 불모지와 같았던 우리나라 구석기문화의 체계를 세워 놓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를 구석기시대까지 올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석장리유적은 제1·2지구로 나뉘는데, 1지구에서는 후기 집터 층에서 2만 8천년 전과 그 아래층에서 3만 6백년전의 연대가 밝혀졌다. 2지구에서는 절대연대가 밝혀진 것은 없으나 여러 층위에서 사람이 살았으며, 그들의 석기 제작기술은 외날찍개, 양날찍개, 이른 주먹도끼, 발달된 주먹도끼 및 격지긁개,돌날석기,새기개,좀돌날등의 단계를 거쳐 발달하였다.
조사 결과, 석장리유적은 전기 구석기부터 후기 구석기까지 형성된 문화층으로 밝혀졌다. 맨 아래층의 외날찍개 문화층은 암반층인 석비레층 위에 바로 쌓인 층으로, 제2빙하기인 55~45만년 전 사이에 이루어진 층이고, 2문화층은 제3빙하기인 35~32만년전 사이, 3·4문화층은 21만년 전의 제3빙하기 뒤쪽으로, 5문화층은 18만년전의 빙하기, 6문화층은 제3간빙기인 12만년경 전으로 각각 추정된다. 중기구석기 성격을 지닌 자갈돌 찍개 문화층은 따뜻한 기후아래 이루어진 것으로 그 아래쪽의 찰흙층에서 산화철이 굳어서 이루어진 뿌리테가 나왔다. 이 층의 석기들은 아슐리앙 전통의 주먹도끼, 돌려떼기 수법의 몸돌, 격지돌이 있어, 7만~6만년 전 쯤으로 추정된다. 8·9문화층은 제4빙하기에 이루어진 6만~5만년 전으로, 10·11문화층은 3~2만년 전으로 각각 추정되고 있다.
발굴이란고고학적 목적에 의하여 땅속에 묻혀 있는 유구나 유물을 모든 과학적 원리를 이용하여 찾아 조사하여 본래의 모습대로 복원, 문화의 성격을 구명하고자 하려는 방법을 말하며 발굴의 종류로는 크게 학술발굴과 구제 발굴로 구분 되는데 석장리는 가장 모범적인 학술 발굴 유적지입니다. 제5전시 발굴에서는 1964년에서 1992년까지의 발굴 역사 사진, 발굴 모형 디오라마, 지층 단명, 1호 집터 복원, 발굴도구, 그리고 발굴자료등의 다양한 자료들을 전시 연출 하고 있습니다.
공주 석장리박물관
충청남도 공주시 장기면 석장리 98
041-840-2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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