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보물들이 즐비한 국립중앙박물관 석조물정원

2012. 3. 27. 18:00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가지정 문화재

 

 

 

국보,보물들이 즐비한 국립중앙박물관 석조물정원

 

 

 

우리나라 최초의 팔각 집 모양의 승탑인 염거화상 탑(국보 104호)을 비롯하여,

 고려 태조 왕건이 가장 공을 들여세운 흥법사 진공대사탑과
석관(보물 265호), 개성에서 옮겨온 것으로 고려 석탑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남계원(국보 100호)과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종으로 알려진
보신각종(보물2호)등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 문화재의 백미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갈항사 동서 삼층 석탑 (국보 99호)

경상북도 김천의 갈항사 터 동·서쪽에 세워져 있던 것을 1916년 서울 경복궁으로 옮겨온 후 국립중앙박물관이 이전, 개관하면서 야외에 전시중이다.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일반적인 모습이며, 서로 규모와 구조가 같다. 기단의 네 모서리와 각 면의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는데, 특히 가운데 기둥은 두 개씩을 두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하고 있으며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의 밑면에는 5단씩의 받 침을 마련하였다.
기둥과 면석 등에는 정혈(釘穴)이 있는데 여기에는 금동판(金銅板)의 장식을 따로 부착하였던 자리로 추정된다. 두 탑은 규모는 크지는 않으나 조화로운 각부 구성을 보이며 통일신라 초기 석탑의 양식을 잘 이어받았다. 한편 동탑의 기단부에는 경덕왕 17년(758)에 탑을 세웠다는 내용이 새져 있어 제작연대를 파악할 수 있어 중요하다.

 

 

 

 

남계원 칠층 석탑 (국보 100호)

이 석탑은 경기도 개성시 덕암동 부근의 남계원 절터에 있던 것을 1915년에 경복궁으로 옮겨왔고 2005년 다시 지금의 위치에 세운 것이다.
전체적인 탑의 기틀은 신라 석탑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으나 몸체가 되는 탑신의 층수가 많아지고, 추녀 끝에서 지붕 밑이 들려지며 전체적으로도 묵직한 조형 감각을 나타내고 있는 점 등에서는 고려 석탑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이 탑 안에서는 고려 충렬왕 9년(1283)에 봉안한 것으로 여겨지는 쪽물을 들인 종이에 은물로 글씨를 쓴 경전[紺紙銀泥寫經] 일곱 축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홍제동 오층석탑 (보물 166호)

이탑은 홍제동 사현사터에 있던 탑으로 고려 정종11년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으면서도 온화하고 부드러운 새김법과 새롭게 유행한 탑신 받침의 덧붙임, 그리고 벽 테두리 장식등에서 고려 전기의 석탑의 조형미가 드러난다.

 

 

 

 

 

고달사 쌍사자 석등 (보물 282호)

두 마리 사자가 불발기집(火舍石)을 받치고 있는 매우 특이한 형태의 석등이다. 통일신라에서부터 이러한 형태의 석등이 등장하지만, 이 고달사 쌍사자 석등은 여느 쌍사자 석등과 달리 웅크린 사자가 불발기집을 받치고 있어 이채롭다. 이 석등은 고달사가 우리나라 3대 선원의 하나인 고달원高達院으로 명성을 떨치던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영전사 보제존자 사리탑 (보물 358호)

이 승탑은 고려시대 말기에 활동한 고승 보제존자의 묘탑으로 우왕 14년(1388)에 세워진 것이다. 보제존자는 나옹화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원래 이 승탑은 강원도 원주시 영전사 절터에 있다가 1915년에 서울로 옮겨왔다.
이 승탑은 일반적인 승려의 묘탑과 달리 석탑모양의 쌍탑을 이루고 있는데 이처럼 고려시대 말기에는 승탑도 석탑과 같은 형태로 조성되기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탑의 조형에서는 짜임새 있고 안정된 균형을 이루고 있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보제존자 즉 나옹화상은 신륵사에도 석종형 승탑(보물 228호)이 있는데, 제자들이 나옹화상의 사리를 나누어 영전사와 신륵사에 각기 묘탑을 세워 봉안한 것이다.

 

 

 

 

 

나주 서문 석등 (보물 364호)

이 석등은 전라남도 나주의 읍성 터 서문 안의 절터에 파손된 채로 남아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석등의 기둥 돌에는 석등을 세운 내력과 함께 이 석등이 고려 선종 10년(1093)에 만들어졌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석등의 본체인 불발기집은 파손되어 조선총독부 시절 다시 옛 모습대로 만들었으며, 그 위의 지붕은 처마 밑에 드림 장식을 하고 처마와 추녀 끝에는 귀꽃 장식을 하여 고려시대 중엽에 새로이 드러내는 매우 장식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지붕 위에는 현재 작고 아담한 덧지붕만이 남아 있으며, 맨 꼭대기의 꽃봉오리 모양의 보주는 원래 부서진 것을 옛 모양대로 새로 만든 것이다. 이 석등은 고려시대 문화의 전성기에 나타난 단아하고 격조 있는 팔각석등의 조형적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현화사 석등

고려 현종 10년(1020)에 세워진 석등으로 원래 경기도 개성 부근의 현화사 터에 있다가 1911년 서울로 옮겨왔다.
이 석등은 일반적인 팔각 석등과 달리 사각 석등으로 되어 있고 불발기집도 사방으로 시원하게 트여 있다. 불발기집에 세운 작은 네 기둥은 석등 밑의 간주석(받침 기둥) 모양을 축소한 형태이며, 지붕은 듬직하고 안정감이 있다.
이 석등의 당당한 품격과 신선하고 세련된 조형미는 고려시대 문화의 전성기에 새롭게 등장하는 석등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석등의 장대한 규모와 건장한 자태는 당시 국가 대찰로 창건된 현화사의 명성을 짐작케 한다.

 

 

 

 

 

 

거돈사 원공국사 승묘탑 (보물 190호)

이 승탑은 고려 태조 13년(930)에 출생하여 현종 9년(1018)에 입적한 고려시대 전기의 고승 원공국사의 묘탑이다. 원래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의 거돈사 터에 세워졌는데 1948년에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이 승탑과 같이 있던 탑비는 지금도 거돈사 절터에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 승탑을 이어 받은 팔각 집 모양으로 단정하고 균형 잡힌 형태에 격조 있는 장식을 더하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 승탑 중에서 매우 수준 높은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흥법사 진공대사 탑과 석관 (보물 365)

이 승탑과 석관은 신라 말기로부터 고려 초기까지 활동한 고승 진공대사의 묘탑과 석관으로 1931년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흥법사 절터에서 옮겨왔다. 진공대사는 중국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신라 효공왕(재위 897~912) 때에 귀국하여 왕사(王師)가 되었다. 고려가 건국된 이후에도 태조의 왕사가 되었다가 태조 23년(940)에 입적하였는데 태조가 친히 비문을 지을 정도로 대사는 생전에 태조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이 승탑은 팔각 집 모양을 기본 평면으로 하였으나 기단 중간부는 원통형으로 하여 구름과 용무늬를 새겼고. 아담한 탑신 위에는 곡선이 강한 지붕을 얹고 보개로 장식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또한 이 승탑은 고려 태조의 왕명으로 지어진 것으로서 고려시대 초기 승탑 중 우수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보리사 대경대사 현기탑비 (보물 361)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에 활약한 승려 대경대사의 업적을 새긴 탑비이다. 원래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의 보리사 절터에 있던 것을 경복궁으로 옮겨온 후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의 야외전시장에서 전시하고 있다.
대경대사는 특히 고려 태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는데 930년에 대사가 입적하자 태조는 ‘대경(大鏡)’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제자와 신도들은 이 탑비를 세웠다.
탑비를 받치고 있는 거북돌[龜趺]의 머리는 보주를 물고 목을 세운 용머리[?首] 모습이며 머릿돌에는 구름과 용을 사실적으로 조각하고 있어 고려시대 초기 탑비예술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 능공탑 (보물 362)

통일신라 말기의 고승이며 신라 선종산문 중의 하나인 봉림산문을 세운 진경대사( 855~923)의 묘탑으로 경상남도 창원시 봉림동의 봉림사 터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승탑의 형태는 팔각 집 모양을 기본으로 하였으며 기단부는 상대, 중대, 하대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으며 기단부의 가운데 부분의 북모양 중대석은 꽃장식의 띠를 두르고 있으며 아래에는 중대받침을 부착하였다. 탑신부의 몸체는 단순한 팔각이며 이무런 장식이 없다. 지붕은 처마 밑이 평탄하며 지붕 위는 경사가 완만하고 널찍한 지붕의 추녀 끝에는 우아한 꽃무늬 장식이 돋아 있다.
전체적으로 날씬한 몸체와 장식을 절제하면서도 변화를 시도한 조형적 특징은 신라 승탑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로이 변모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염거화상탑 (국보 104)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활동한 염거화상의 묘탑으로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흥법사 터에 있었다고 전해지나 확실하지는 않다. 염거화상(?~844)은 도의선사의 제자로, 신라 선종 산문의 하나인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제2대 선사이다. 그는 보조선사에게 가르침을 전하여 가지산문을 대성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탑의 구조를 살펴보면 기단과 탑신, 지붕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현재 기단 밑부분과 상륜부는 없어졌다. 지붕과 탑신은 목조건물의 형태를 충실히 모방하였으며, 탑신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조각되어 있다.
이 승탑은 우리나라 승탑의 기본 형식이 되는 팔각 집(八角堂) 모양을 처음 선보였을 뿐만 아니라 탑 안에서 발견된 금동 탑지(塔誌)를 통해 제작 연대를 알 수 있어 우리나라 승탑의 시원을 밝히는 데 그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