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포 바닷가, 봄이 오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 사적 제159호 경주 이견대 (慶州 利見臺)

2012. 3. 27. 06:38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가지정 문화재

 

 

 감포 바닷가, 봄이 오는 소리가 들려오는 경주 이견대 (慶州 利見臺) 사적  제159호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한 건물이다.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호국정신을 받들어 31대 왕인 신문왕이 681년에 세웠다.

신문왕은 해변에 감은사라는 절을 짓고, 용이 된 아버지가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닐 수 있도록 법당 밑에 동해를 향하여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다. 그 뒤에 용이 나타난 곳을 이견대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이견대에서 신문왕이 용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고 평화롭게 할 수 있는 옥대와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하나 받았다고도 한다. 이견대라는 이름은 신문왕이 바다에 나타난 용을 보고 나라에 크게 이익이 있었다는 뜻을 포함한 말인데, 『주역』의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이란 문구에서 따온 것이다.

발굴조사 때 건물이 있던 자리가 발견됨으로써 신라의 건축양식을 추정하여 오늘날 새롭게 다시 지었다.

 

 

 

 

 

 

만파식적 [萬波息笛]

고전(古典)에 전하는 신라의 신적(神笛)으로 왕이 이 피리를 부니 나라의 모든 근심과 걱정 해결되었다고 전해진다.
신라 제31대 신문왕()은 아버지 문무왕()을 위하여 동해변에 감은사()를 지어 추모하였는데, 죽어서 해룡()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이 합심하여 용을 시켜 동해() 중의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냈다. 이 대나무는 낮이면 갈라져 둘이 되고, 밤이면 합하여 하나가 되는지라 왕은 이 기이한 소식을 듣고 현장에 거동()하였다.

이 때 나타난 용에게 왕이 대나무의 이치를 물으니, 용은 “비유하건대 한 손으로는 어느 소리도 낼 수 없지만 두 손이 마주치면 능히 소리가 나는지라, 이 대도 역시 합한 후에야 소리가 나는 것이요… 또한 대왕은 이 성음()의 이치로 천하의 보배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고 사라졌다. 왕이 곧 이 대나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어 부니, 나라의 모든 걱정 ·근심이 해결되었다 한다. 그리하여 이 피리를 국보로 삼았는데, 효소왕() 때 분실하였다가 우연한 기적으로 다시 찾게 된 후 이름을 만만파파식적()이라 고쳤다고 한다

 

 

 

 

 

 

이견정에 서면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이 가장 잘 보인다.

 

 

 

 

 

 

 

 

 

 

 

 

 

 

 

 

 

문무왕의 유언

"과인은 어지러운 때에 태어난 운명이어서 자주 전쟁을 만났다. 서쪽을 치고 북쪽을 정벌해 강토를 평정했으며, 반란자를 토벌하고 화해를 원하는 자와 손을 잡아 마침내 원근을 안정시켰다. 위로는 선조의 유훈을 받들고 아래로는 부자의 원수를 갚았으며, 전쟁중에 죽은 자와 산 자에게 공평하게 상을 주고 안팎으로 고르게 관작을 주었다. 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천수를 다하도록 했으며, 납세와 부역을 줄여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게 해 백성들은 자기의 집을 편하게 여기고 나라에는 근심이 사라지게 했다. 창고에는 산처럼 곡식이 쌓이고 감옥에는 풀밭이 우거졌으니, 가히 선조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고 백성들에게도 짐진 것이 없었다고 할 만했다. "

 

"내가 풍상을 겪어 드디어 병이 생겼고, 정사에 힘이 들어 더욱 병이 중하게 됐다. 운명이 다하면 이름만 남는 것은 고금에 동일하니, 홀연 죽음의 어두운 길로 되돌아가는 데 무슨 여한이 있으랴! 태자는 일찍부터 덕을 쌓았고, 오랫동안 동궁의 자리에 있었으니, 위로는 여러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낮은 관리에 이르기까지 죽은 자를 보내는 의리를 어기지 말고 산 자를 섬기는 예를 잊지 말라. 종묘사직의 주인은 잠시라도 비어서는 안 될 것이니 태자는 나의 관 앞에서 왕위를 계승하라. "

 

"세월이 가면 산과 계곡도 변하고 세대 또한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오왕(吳王: 오의 손권)의 북산 무덤에서 어찌 향로의 광채를 볼 수 있겠는가? 위주(魏主: 조조)의 서릉에는 동작(銅雀)이란 이름만 들릴 뿐이로다. 옛날 만사를 처리하던 영웅도 마지막에는 한 무더기 흙이 돼, 나무꾼과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팔 것이다. 그러므로 헛되이 재물을 낭비하는 것은 역사서의 비방거리가 될 것이요,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더라도 나의 혼백을 구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일을 조용히 생각하면 마음 아프기 그지없으니, 이는 내가 즐기는 바가 아니다.

숨을 거둔 열흘 후 바깥 뜰 창고 앞에서 나의 시체를 서국(西國: 印度)의 법식으로 화장하라. 상복의 경중은 본래의 규정이 있으니 그대로 하되, 장례의 절차는 철저히 검소하게 해야 할 것이다. 변경의 성과 요새 및 주와 군의 과세 중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것은 잘 살펴서 모두 폐지할 것이요, 법령과 격식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즉시 바꾸고, 원근에 포고해 백성들이 그 뜻을 알게 하라. 다음 왕이 이를 시행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