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5. 10. 06:00ㆍ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가지정 문화재
[남원여행] 꽃피는 봄날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국가명승 33호인 광한루원
원래 이곳은 조선 세종 원년(1419)에 황희가 광통루라는 누각을 짓고, 산수를 즐기던 곳이었다. 1444년 전라도 관찰사 정인지가 광통루를 거닐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이곳을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칭한 후 ‘광한루’라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1461년 부사 장의국은 광한루를 보수하고, 요천의 맑은 물을 끌어다가 하늘나라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만들었다.
광한루원의 호수에는 지상의 낙원을 상징하는 연꽃을 심고,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에 가로막혀 만나지 못하다가 칠월칠석날 단 한번 만난다는 사랑의 다리 ‘오작교’를 연못 위에 설치하였다. 이 돌다리는 4개의 무지개 모양의 구멍이 있어 양쪽의 물이 통하게 되어 있으며, 한국 정원의 가장 대표적인 다리이다.
1582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정철은 광한루를 크게 고쳐 짓고, 은하수 연못 가운데에 신선이 살고 있다는 전설의 삼신산을 상징하는 봉래·방장·영주섬을 만들어 봉래섬에는 백일홍, 방장섬에는 대나무를 심고, 영주섬에는 ‘영주각’이란 정자를 세웠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왜구들의 방화로 모두 불타버렸다.
광한루원은 은하수<銀河水>를 상징하는 연못가에 월궁<月宮>을 상징하는 광한루와 지상<地上>의 낙원인 삼신산<三神山>이 함께 어울려 있는 아득한 우주관<宇宙觀>을 표현한 한국 제일의 누원<樓苑>이다. 원래 이곳은 조선<朝鮮> 세종<世宗> 원년<元年>(1419) 황희<黃喜>가 광통루<廣通樓>라는 작은 누<樓>를 지어 산수<山水>를 즐기던 곳이다. 세종 26년(1444) 전라도<全羅道> 관찰사<觀察使> 정인지<鄭麟趾>가 광통루에 노니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이곳은 달나라 미인 항아<姮娥>가 사는 월궁 속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한후 광한루<廣寒樓>라 이름을 고쳤다. 세조<世祖> 7년(1461) 남원부사<南原府使> 장의국<張義國>은 광한루를 중수<重修>하고 요천<蓼川>의 맑은 물을 끌어들여 하늘나라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만들고, 견우<牽牛>와 직녀<織女>가 은하수에 가로막혀 만나지 못하다가 7월 7석날 단 한 번 만난다는 사랑의 다리 오작교<烏鵲橋>을 연못 위에 설치하였다. 이 석교는 네 개의 홍예<虹霓>로 구성되었는데, 한국 조원<造苑> 공간 속에 있는 가장 대표적인 다리이다. 선조<宣祖> 15년(1582)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정철<鄭撤>이 광한루를 크게 고쳐 짓고 연못 속에 신선이 살고 불로초<不老草>가 있다는 봉래<逢萊>섬, 방장<方丈>섬, 영주<瀛洲>섬의 삼신도<三神島>를 만들고, 봉래섬에는 백일홍<百日紅>, 방장섬에는 대나무를 심었으며, 영주섬에는 영주각<瀛洲閣>이란 정자를 세웠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왜군이 남원성을 침공하여 광한루가 불타고 누원이 모두 황폐하였다. 선조 40년(1607)에 작은 누각이 복구되고, 인조<仁祖> 17년(1639)에 남원부사 신감<申鑑>이 현재의 광한루를 복원하였다. 정조<正祖> 18년(1794)에는 영주각이 복원되고, 1964년에 방장섬에 방장정<方丈亭>이 건립되었다. 이 광한루원은 소설 『춘향전<春香傳>』에서 이도령과 춘향이 인연을 맺은 처소로도 유명하여 1920년대에 경내에 춘향사<春香祠>를 건립하고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화백<畵伯>이 그린 춘향의 영정을 모셔 놓았다. 해마다 음력 5월 5일 단오절<端午節>에는 춘향제가 성대히 열린다.
남원 광한루 (南原 廣寒樓) 보물 제281호
누(樓)란 사방을 트고 마루를 한층 높여 자연과 어우러져 쉴 수 있도록 경치 좋은 곳에 지은 건물을 말한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 이름난 황희정승이 남원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것으로 처음엔 광통루(廣通樓)라 불렀다고 한다. 광한루(廣寒樓)라는 이름은 세종 16년(1434) 정인지가 고쳐 세운 뒤 바꾼 이름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정유재란 때 불에 탄 것을 인조 16년(1638) 다시 지은 것으로 부속건물은 정조 때 세운 것이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누마루 주변에는 난간을 둘렀고 기둥 사이에는 4면 모두 문을 달아 놓았는데, 여름에는 사방이 트이게끔 안쪽으로 걸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또한 누의 동쪽에 있는 앞면 2칸·옆면 1칸의 부속건물은 주위로 툇마루와 난간을 둘렀고 안쪽은 온돌방으로 만들어 놓았다. 뒷면 가운데 칸에 있는 계단은 조선 후기에 만든 것이다.
춘향전의 무대로도 널리 알려진 곳으로 넓은 인공 정원이 주변 경치를 한층 돋구고 있어 한국 누정의 대표가 되는 문화재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오작교 [烏鵲橋]
선조15년(1582)에 남원부사 장의국은 광한루를 수리하면서 다리를 새로놓고 오작교라 부르게 됐다. 그 이후 광한루는 정유재란때 불타 1626년 복원됐지만 오작교는 처음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오작교는 길이 57m, 폭 2.4m, 4개의 홍예경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존하는 연지교중 국내에서는 규모가 가장 크다.
또한, 오작교를 밟으면 부부 금실이 좋아진다는 전설이 있고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이 어린곳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처녀가 아닌 사람이 다리를 건너면 다리가 무너진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처럼 광한루와 오작교는 전설과 사랑이 어우러져 있어, 춘향이가 단오날 그네를 뛰는 것을 광한루에 올라앉아 이도령이 보고 첫눈에 반해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것처럼 사랑하는 연인들의 다리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삼신산 방장정
삼신산의 영주(한라산), 봉래(금강산), 방장(지리산) 중 방장에 위치하고 있는 방장정은 세련된 건축양식보다는 소박한 멋을 살린 아담한 모습을 하고 있다.
방장은 전라감사 송강 정철이 삼신도를 조성함에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방장정이 세워진 시기는 1963년부터 시작된 광한루원 확장 정화계획에 따라 당시 남원군수 이화익의 창안으로 도편수 이한봉이 건축하였다. 그 모습을 보면 기단부는 형성되어 있지 않고 원형의 가공초석위에 복석형태의 화강석을 얹고 위에 기둥과 귀틀을 세워 장마루를 깔았다.
또한 누난간은 설치되지 않고 다소 높은 듯한 기둥위에 계두, 양서, 수서 등을 걸치고 주심도리를 높게 설치하였으나 칸사이가 좁은 관계로 화반은 설치 하지 않은 듯하다. 천장은 육각형의 소란대를 걸쳐 우물반자를 설치하였고 연목과 부연을 둔 겹처마를 형성하고 있으며 단청은 기둥머리부터 금모로 단청을 하였다
춘향사당
열녀 춘향의 굳은 절개를 기리기위해 건립한 사당이다. 춘향 인물 초상화 세 점이 있다. 최초의 춘향 영정은 춘향사당이 건립되던 1931년경에 제작된 강주수 화백의 작품이다. 그뒤 1939년 이당 김은호 화백이 첫 번째 그린 작품을 현준호가 기증하여 봉안하였으나 한국전쟁 중에 춘향 영정이 훼손되자, 1961년 이당 김은호 화백이 다시 그린 것을 당시 내각수반이던 송효찬장군이 기증하여 현재까지 봉안하고 있다. 진본은 남원시 향토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춘향 영정은 한국의 여인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미인도 개념으로, 역사적 여인상을 재현하려는 의도에서 제작된 것이다. 진주 출신의 강주수가 만든 작품은 물론이고, 1939년에 고고학자와 조각가, 문화사, 연출가 등이 총체적으로 참여하여 조선 기생 김명애를 모델로 하여 전신상으로 김은호가 제작한 점도 특이하지 않을 수 없다.
『이당 김은호 작품집』에는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춘향 영정, 또는 춘향 미인도의 두 번에 걸친 제작 경위에 대해, “지금은 1961년에 예전과 똑같이 다시 그린 춘향 그림이 걸려 있지만 남원 춘향사당의 원래 작품은 1939년에 제작되었다.
그 전년도에 서울에서 한 극단이 「춘향」을 공연한 데서 비롯된 이 춘향상은 당시 광주의 호남은행 현준호 은행장이 재정적인 후원을 하고 송석하·김태준·유치진 등으로부터 춘향상의 형태에 대한 다각적 조언을 받아 착수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무참히 파괴되어 그후 현재의 간청으로 이당이 다시 그리게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춘향 영정이 서울에서 제작되어 열차 편으로 남원에 도착할 무렵 남원역에는 남원시민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는 기록에서 춘향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비석군
이 비석들은 과거에 남원과 인연을 맺은 관찰사.부사,어사등의 사저비및 선정비다. 남뭔시 여러곳에 흩어져 있는것을 소를을 훼손을 방지하고자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비석의 제작연대가 조선 중기부터 후기까지 다양하여 남원의 역사와 비석변천의 과정을 엿 볼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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