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여행] 비슬산 소재사

2012. 5. 11. 09:30전국 절집이야기/사찰(寺刹) 이야기

 

 

[대구여행]  비슬산 소재사(消災寺)

 

소재사는 비슬산 남서 중턱 해발 450미터에 자리하고 있다. 최초 창건 시기는 신라 시대로 전해지고 있다. 2000년 대웅전 보수시 확인된 상량문의 내용에는 1673년에 명부전과 함께 지었으며, 1857년(철종 8년)에 법로(法盧) 화상이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한때 상주했던 대중이 산내 암자와 더불어 3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그 규모가 큰 사찰이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사역이 대단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웅전은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다포계 맞배 지붕건물이다. 외벌대의 낮은 기단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원기둥을 세웠다.

건물의 전면벽체는 3칸 모두 문으로 구성하였는데 어칸에는 4짝 여닫이, 향 퇴칸에는 2짝여닫이문을 두었다. 배면에도 양쪽 퇴칸에 한짝의 여닫이문을 두었는데 정면, 배면 모두 문짝이 최근에 교체되었으며, 문틀일부도 교체가 되었는데 된 것이다. 다만 배면 어칸에 두짝문이 있었던 연귀맞춤 흔적이 남아있는데 이러한 배면3칸 모두에 창호를 둔 것은 17세기 중반에서 18세기 초까지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대웅전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내진기둥을 세우고 후불벽을 설치하고 그 앞에 수미단을 두었다. 수미단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삼세불(약사여래와 연등불)이 모셔져 있는데 우물마루와 수미단 모두 근년에 교체하였다.

후불벽을 설치한 내진기둥은 3칸 측면 뒤편 외진기둥열에서 1m 정도 뒤로 물려 전면의 예불공간을 확보하려 하였다. 천장은 측면 중앙을 높게하고 전후칸을 낮게 하여 층급을 두어 우물천장을 설치하였는데, 불단 상부는 닫집을 두거나 장식천장을 두지 않았다.

대웅전의 구조는 1고주 5량으로 되었는데 내고주는 후불벽을 구축하기 위한 것으로 측면 뒤편 외진기둥열에서 1m 정도 뒤로 물려 전면의 예불공간을 확보하려하였다. 조선 후기적인 수법이다. 좌측면기둥은 일부를 서로 이어 댄 흔적이 있으며 기둥 상부의 보아지 구성이 틀리는 부분이 있어 중수의 흔적이 나타난다.

포작의 형태는 전면과 배면이 상이하게 하였다. 전면 포작의 형태는 첨차는 교두형이며, 살미는 외2출목이기 때문에 3제공으로 이루어졌는데 초제공과 2제공은 앙서의 형태로 살미위에 연잎과 연봉을 올려 장식하였으나 3제공은 일반적으로 수서로 꾸미는데 여기서는 살미뿌리에 만개한 연꽃을 두었다. 3제공위의 초공은 鳳頭로 초각하였다. 대체적으로 조선후기적인 모습이다.

 

 

 

 

 

 

배면은 전면보다는 매우 단순한 모습인데 살미의 형태가 첨차와 유사하게 꾸며 장식을 배제하였다. 그러나 내부살미는 전후면 모두 살미의 끝을 연봉 및 연꽃으로 초각하여 장식한 모습은 동일하다.

이렇게 전후면의 형태나 포작수가 틀리게 하여 정면만을 강조하고 배면은 상대적으로 약식으로 처리하였다.이러한 모습은 단청에서도 보이는데 정면은 금단청을 시채하였으나 측면과 배면은 모로단청을 하여 배면의 격을 낮추었다. 대웅전의 내부 벽면 좌우측에는 오래 되어 비록 많이 퇴색하였으나 채색과 붓선의 흐름이 매우 뛰어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 벽화가 있다.

일반적으로 다포계 맞배집 형식이 주불전에 사용되는 고급의 법식이기는 하나 큰 규모사찰에서는 주불전으로 채택되지 않고 대체로 소규모의 단원형 사찰의 주불전으로 많이 사용되는 것으로 보아 경제적인 문제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임란 직후에 건립되는 경우에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소재사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소재사목조지장보살좌상 (消災寺木造地藏菩薩坐像)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4호

 

 

 

 소재사 명부전에 봉안된 지장보살좌상이다. 최근 개금불사에서 출토된 복장품에서 강희12년 계축4월일(1674)에 조상했고 건륭6년 신유3월20일(1741)에 중수개금을 시작하여 4월6일에 마쳤다고 하는 복장기를 확인하였다. 즉 조상연대와 중수기록이 있고 또한 지장보살로서는 비교적 큰 규모이며 조선후기 작품이면서도 조선 전기 양식을 일부 간직하고 있어 조상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이 불상은 머리를 앞으로 약간 숙인 자세이고 항마좌의 결가부좌상이다. 머리는 삭발스님의 머리인 소발이며, 상호는 넙적한 이마의 양미간에 작은 백호가 있으며 이목구비는 단정하다. 목이 짧지는 않으나 삼도가 없다. 널찍한 가슴은 편편하며 아무런 장신구가 없다. 수인은 두 손을 모두 무릎 위에 올렸고 왼손은 손가락을 위로 오른손은 손가락을 아래로 하여 엄지와 중기를 잡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양팔에 걸치고 무릎을 덮고 있다. 군의는 두겹으로 가슴부위까지 올려져 있다.옷주름의 조각표현은 두텁게 금칠한 탓으로 정확히 관찰하기가 어렵다. 대체로 형식화한 양식에 약간 두터운 듯한 감을 주기는 하나 주름의 각선이 조선후기에 볼 수 있는 판에 박힌 듯한 단일적 양식과는 달리 양 어깨와 양 팔에 걸쳐진 법의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조선전기에서 볼 수 있는 양식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