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백제의 수도 부여의 문화와 역사를 볼 수 있는 국립부여박물관 [충남/부여여행]

2012. 9. 9. 06:00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내 박물관

 

 

 

 

 

사비백제의 수도 부여의 문화와 역사를 볼 수 있는 국립부여박물관 [충남/부여여행] 

 

 

 

 

충남의 선사 문화과 백제의 문화를 보존하고 알리기 위해 설립된 박물관입니다.

사비백제의 수도 부여에서 출토된 유물이 주로 전시되어 있으며,

 그 시대의 다양한 문화와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6만m2의 규모에,

 3개의 전시실과 교육실, 체험실 등이 있습니다.

충남의 청동기부터 사비백제 이전시대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제1전시실, 백제와 사비시대의 모습을 담은 제2전시실, 백제 불상을 모은 제3전시실,

그리고 교육, 체험 위주의 다채로운 프로그램도 운영되고 있지요.

 전화 또는 홈페이지에서 예약하면 해설 서비스도 이용할 수 있습니다.

buyeo.museum.go.kr

 

 

 

 

 

 

 

 

 

 

 

 

박물관석조여래입상


1933년에 부여군 부여읍 금성산의 전천왕사터의 부근에서 발견된 불상이다.

몸체에 비해 머리가 크며 어깨와 하체가 거의 일직선을 이루면서 곧바로 서있는 자세이다.

얼굴은 살이 올라 풍만하며 눈은 반쯤 감겨 있다. 목에는 3줄의 주름인 삼도가 새겨져 잇으며,

 양 어깨에 걸친 옷은 아무런 무늬없이 발 밑까지 내려져 있다. 왼손은 위로 올려 손바닥이 밖을 향하게 하였고,

 오른손은 아래로 늘어뜨려 손바닥이 보이게 하였다. 이 불상은 몸체에 비해 머리가 크게

 표현되어 균형미를 잃고 있다. 충청도 일원에서 유행한 고려시대 불상으로 추정된다.

 

 

 

 

 

 

 

부여석조


이 석조는 왕궁에서 연꽃을 심어 그꽃을 즐겼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것으로 工자형 받침위에

둥근 꽃봉오리 형탱의 석조가 올려져잇다. 본래 이석조가 있엇던 장소는 백제의 왕궁터로

전해지고 있어 당시 왕궁에서 사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형태가 풍만하면서도 깔끔한 곡선으로 처리되어,

백제인의 간결하고 소박한 미적감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석조의 표면에는 일정한 간경으로 세로줄을 새기고

그사이에 글을 새겨 넣었으나 지금은 흔적만 보인다. 글은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했다는 내용으로

부여 정림사터 오층석탑의 1층 탑옴돌에 새긴 것과 같은 것이다.

 

 

 

 

 

새로운시대로 농경사회의 서막
기원전 1500년을 전후한 시점에 덧피새김무늬토기문화가 등장하면서 청동기시대의 시작과 함께

농경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청동기시대 전기에는 짧은 빗금무늬가 새겨진 겹아가리토기,

 구멍무늬토기,구멍무늬에 다양한 무늬가 혼합된 토기 등이 사용되었다. 이 시기의 청동기인들은

 2개이상의 화덕자리가 설치된 긴 네모꼴의 집터에 여러세대의 가족이 함께 거주하였다.

이는경작지 화보를 위해 많은 노동력과 이동성이요구되는 화전농경방식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마한의 여명


마한은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4세기 후반까지 존속하였으며, 한강유역과 중서부 지방에서 시작하여

호서와 호남 지방에 분포하였다가 백제가 금강 이북의 마한 지역을 직접 지배하게 되면서 해체되었다.

 마한지역에는 기원전 3세기 경 기존의 송국리형문화와는 다른 덧띠토기문화가 유입되어 한국식동검문화와 함께

발전하면서 토차갓회에 변화를 가져온다. 기원전 2세기 초에는 중국 전국시대연나라의 철기문화가

 마한지역까지 파급되어 점차 토착사회를 재편하여 마한 54개 소국을 이루게 되었다.

 

 

 

 

 

 

 

 

 

 

 

말 모양의 허리띠 고리

 

 

 

 

 

 

마한토기, 새로운 기술을 채용하다


마한토기는 중국 전국계 및 낙랑의 새로운 토기 제작기술을 받아들여 이전과는 다른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토기 기벽을 두드리는 타날기법을 사용하고, 물레를 사용하여 토기 제작이 빨라졌으며, 지붕있는 가마의 도입으로

소성온도를 높여 대량으로 생산할수 있게 되엇다.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를 꼐승한 경질무문토기도 사용되었으나,

3세기 중엽이 되면 대부분 소멸되고 두드림무늬토기가 성행하게 된다 . 마한지역에서는 두귀단지 겹입술토기,

새모양토기,톱니무늬토기등과 같이 강한 지역색이 드러나는 특징적인 토기가 만들어졌다.

 

 

 

 

 

 

 

 

 

 

 

호자는 어디에 쓰였을까?


호자는 중국 남조 문물의 영향을 받은 호랑이 모양의 남성용 요강이다.

호랑이가 앞다리를  세우고 상체를 들어 얼굴을 왼쪽으로 돌린 상태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모양으로 손으로 들고 다닐 수 있도록 등 부분에 손잡이가 달려있다.

중국의 고대 기록에는 황제가 행차할 때 시중을 드는 하인이 호자를 들고 뒤따랐다는 내용이 전해온다.

 

 

 

 

 

 

 

능산리 절 강당에서는 무슨 이이 일어난 것일까?


보통절의 강당은 강론이나 설법하는 장소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전체가 트여있는건 통칸 구조를 띠게 된다.

 그러나 능산리 절은 강당지를 중심으로 공방지 1 , 2, 불명건물지 1,2의 초기건물지군이 n자형으로

독특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강당지 내부는 퇴칸을 갖추고 2실로 분리되어 있다.

서실은 중앙엔 신좌로 추정되는 큰 받침돌이 있으며, 동실은 내부에 초석이 없는 통칸으로 트여있다.

이건물들은 서왕릉의 축조나 서왕을 추복하기위해 제사를 담당하던 '사당'으로 추정되며,

 567년 목탑이 건립됨에 따라 불교 사찰의 부속건물로 사용되지만 일정기간기존 기능을 수행햇을 것으로 보인다.

 

 

 

 

 

 

목간이 들려주는 능산리 절 이야기


능산사지에서 발굴된 목간은 주로 중문지 남서쪽과 동남쪽의 초기 자연배수로에서 출토되었다.

 이 목간의 대부분은 554년 고나산성 전투무렵부터 목탑이 건립된 567년 전후의 시기에 사용되다가

 폐기된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 조금 늦은 시기의 목간 1점이 8차 조사에서 발굴 되었는데

 이것은 6세기 후반에 제작되었다가 페기된 것으로 볼수 있다.
능산리사지에 남겨진 목간들은 내용에 따라서 불교의례,제의,주술,

 물품의 이동, 문서행위 등을 기록한 것으로 나누어 볼수 있다.

 

 

 

 

 

 

남근형 목간


나쁜 기운을 막기위한 주술적인 용도로 사용했던 남근형 목간이다.

이 목간에 보이는 기락에 세운다는 뜻의 도연립은 도성 바깥에서 사악한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일본의 도향제와 관련지어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남근숭배사상은 생산 풍요를 기원하는 민간신앙으로서

남근의 왕성한 새명력을 바탕으로 사악한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위한 의례에 사용된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관산성 전투에서 뜻하지 않게

죽음을 당한 서왕의 명복을 빌고 아울러 취약했던 위덕왕 정권에

 대한 백제의 증흥을 기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


목탑지 심초석 위에서 발견된 사리감은 아래가 편평하고 위가 둥근 아치형으로 무덤의 입구를 연상시킨다.

 앞면에는 "백제 창왕 13년 정해년에 왕의 누이이인 형고중가 사리를 공양하였다. 고 써있다.

창왕 즉 의덕왕은 성왕의 아들로 백제의 왕릉이 잇는 능산리에 절을 세워 아버지의 넋을 기리고,

불교를 통해 서왕이 이루지 못한 백제 중흥의 꿈을 실현코자 하였다.

 이 사리감은 위덕왕의 이러한 간절한 염원을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능산리지 토기

 

 

 

 

 

 

 

 

 

 

"용의 아들, 서동",왕이 되다


삼국유사의 무왕이야기
삼국유사에는 무왕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이야기가 실려잇다.

 그 기록에 의하면 서울의 남쪽 연못가에 홀로 살던 여인이 용과 관계하여 낳은 인물이 무왕이다.

 그는 이럴때 마를 캐어 팔아서 시동으로 불렸으나 재주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고 한다.

또한 아름답기로 소문난 신라의 선화 공주를 서동요로 꾀어내 결혼하여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고 전한다.

 

무왕은 왜 서동으로 살야 했을까?
무왕의 이야기는 당시의 정치사회적 상황에 대한 중요한 실마리를 담고 있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용은 예로부터 왕의 상징으로 무왕이 '왕의 아들'임을 뜻한다. 무왕의 아버지인 법왕은 위덕왕 재위 시기에는

 왕의 조카였다. 담로제에 의해 지방을 통치하던 법왕이 여인을 만나 무왕이 태어나게 되고

 이후 왕궁에 받아들여지지 못하여 반반한 유년시절을 보내야했던 것은 아니 었을까.

 

 

 

 

 

 

 

 

 

 

무왕 이전의 이야기


위덕왕은 553년 신라가 나제동맹을 깨고 백제가 병합하려는

 한강유역을 차지하자 보복하기위해 전쟁에 나섰다.

 도우러 간 아버지 서왕이 관산성에서 전사하자 신라에 대한 백제의 원망은 깊어지게 되었다.

 위덕왕은 아버지 성왕의 추복을 위해 사비의 동쪽에 능사를

, 서쪽에는 죽은 아들을 위해 왕흥사자에 각각 원찰을 건립하였다.

 

 

 

 

 

 

 

 

 

 

 

표석

 

 

 

부여 구아리 출토 유물

 

 

 

 

 

부여 정림사지 출토 유물

 

 

 

 

 

 

성왕 의관제를 정비하다
성앙은 사비천도후 의관제를 정비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왕은 검은 비단으로 만든 모자에 금꽃으로 장식하였고

 6품 나솔이상의 관리들은 은꽃으로 장식하였다고 전해진다.

 은제관꾸미개로 대표되는 의관제는 성왕이 지방통치체제로 삼은

 방,군,성,체제의 확립에 다라 중앙은 물론 지방사회까지 폭넓게 보급되었다.

 

 

 

 

 

 

 

 

 

 

백제의 금동불
백제의 금동불은 현재 25cm이하의 작은 불상들이 전해진다. 이러한 불상들은 승려들이 가지고 다니며

 불법을 전하는데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6세기에는 중앙에 부처가 있고 좌우에 협시보살을

 돈 "일광삼존불"양식이 유행하여 부소산 출토 "정지원"명 삼존불과 같은 예가 제작 되었다.
이후 불상들은 표정이 훨씬 밝아지고 백제 특유의 여유로우면서도 다소 천진한 미소가 표현되기 시작하는데,

 부여 군수리사지 출토 금동보살입상을 들 수 있다. 7세기에 들면 불상들은

 신체비래와 입체감이 강조되고 훨씬 세련된 조각수법을 보여준다.

 

 

 

 

 

 

 

 

 

 

의자왕은 어떤 사람이었나?
백제 제31대 의자왕은 641년 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660년 멸망할 때까지 백제를 다스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의자왕은 웅위하고 용감하며 결단력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해동의 증자로 일컬어졌을 만큼

효성스럽고 형제 사이에 우애가 깊었다. 아들 부여융의 묘지에는 과단성 있고 침착하며 사려 깊었던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의자왕은 무왕 33년 (642년) 장년의 나이로 태자가 되었다. 어렵게 태자가 되어 왕위에 올랐지만 즉위 후 왕권에 위협이 되는

 세력을 단호히 제거하였고, 신라를 공격하여 군사적 요지인 대야성을 함락시키는 등 강성한 국력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재위 15년 즈음부터 궁궐을 호화롭게 짓고 연희를 즐기며, 오랫동안 신임했던

충신을 유배 보내는등 실정을 일삼아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부덕한 군주가 되고 말았다.

 

 

 

 

 

 

 

 

 

 

 

국립부여박물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산16-9

041-833-8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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