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친 권력욕에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휴전이후 부통령이였던 이기붕별장 [강원도/화진포]

2012. 9. 23. 06:00전국 방방곡곡 여행지/강원도 여행지

 

 

 

 

 

지나친 권력욕에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휴전이후 부통령이였던  이기붕별장 [강원도/화진포]

 

 

 

1920년대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건축되어

사용된 건물로써 해방이후 북한 공산당의

간부휴양소로 사용되어 오다가 휴전이후 부통령이었던

이기붕씨의 부인 박마리아 여사가 개인별장으로

사용하다가 폐쇄되었으나 1999년 7월 역사 안보전시관으로

개수하여 관람객에게 전시하고 있다

 

 

 

 

 

 

 

 

 

 

 

이기붕 [李起鵬, 1896~1960.4.28]
  
  본관 전주(全州). 호 만송(晩松). 서울 출생. 연희전문을 중퇴하고,

선교사 J.R.무스의 통역으로 있다가 그의 도움으로 상하이[上海]를 경유,

미국에 가서 고학으로 아이오와주(州) 데이버대학을 졸업하였다.

그후 뉴욕에서 허정(許政) 등과 교포신문인 《삼일신문(三一新聞)》 발간에 참여하였다.

1934년 귀국, 1945년 이승만(李承晩)의 비서로 정계에 들어갔으며,

1949년 서울특별시 시장, 1951년 국방부 장관이 되어 국민방위군(國民防衛軍) 사건을 처리하였다.
  

 

 

 

 

 

이기붕은 1951년 이승만의 지시로 이범석(李範奭)과 함께 자유당(自由黨)을 창당,

2년 후 이범석의 족청계(族靑系) 세력을 축출하고 중앙위원회 의장에 취임, 실권을 장악하였다.

1954년 5월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어 민의원 의장이 되고,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하여

초대 대통령의 중임(重任)제한 철폐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발의, 일단 부결된 것을

사사오입(四捨五入)으로 번복, 가결을 강행하였다.
  

 

 

 

 

 

 

이기붕은1956년 자유당 공천으로 부통령에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고,

 1960년 3월 15일 대통령선거 때 공개·부정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4·19혁명이 일어나 결국 부통령을 사임하고

경무대(景武臺)에 피신해 있다가 당시 육군장교이던

장남 강석(康石)이 권총을 쏘아 전가족이 자살하였다.

 

 

 

 

 

 

 

 

 

 

 

 

 

 

 

 

 

 

 

 

 

 

 

 

 

 

 

이기붕 일가의 자살

 

1960년 4월 28일 이기붕 일가가 장남 강석의 권총으로 자살했다.

 같은 해 3월 15일에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은 자유당 부통령 후보로,

 장면민주당 후보로 나왔다. 이승만 정권의 강력한 견제세력이었던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죽자 이승만의 대통령 재선은 확실해졌고, 현직 부통령인 장면과 이승만의 세력인

이기붕과의 경합이 더욱 중요한 문제로 등장했다. 결국 온갖 부정과 투표 총계의 조작·날조로

 이기붕이 840만 표를 얻어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민주당은 국회에서 선거의 무효를 주장했고,

 3·15부정선거에 대한 학생·시민들의 거센 항의는 4·19혁명으로 이어져 전국적인 반정부시위가 계속되었다.

 결국 사태의 심각성을 받아들인 내각이 물러나고, 이승만은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권력 아래 정치적 전횡을 일삼아 국민들의 원성을 샀던 이기붕 역시

부통령직을 사임하고 경무대에 피신해 있다가 전가족이 자살함으로써 생을 마감했다.

 

 

 

 

 


박마리아

강원도 강릉에서 가난한 농부의 외동딸로 태어나

어린 시절 남의 집 아이들을 돌봐주기도 했고 때로는 밭에 나가 일을 해준 품삯으로

 궁핍한 생활고를 해결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시절의 경험은 그녀에게 두 가지 유산을 남겼다.

하나는 독실한 기독교도가 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증오에 가까울 만큼 가난에 대한 혐오였다.

 때문에 출세와 입신양명에 대한 끈질긴 그녀의 집념 역시 암울한 유년기를 겪으면서 다져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자식까지 권력의 제물로 바친 권력욕
박마리아 권력욕의 최고정점은 아마도 아들 이강석을 대통령의 양자로 보낸 사건일 것이다.

박마리아와 이기붕 사이엔 장녀인 강희, 장남 강석, 차남 강욱 등 세명의 자녀가 있었다.

하지만 장녀 강희가 이화여중 재학당시 요절했기 때문에 아들만 둘이 있던 셈이었다.

둘 다 재혼이었던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사이에 소생이 없었던 것도 우리에겐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녀는 4,19이후 경무대에 피신해 있다가 전가족이 자살함으로써 욕심많던 생을 마감했다

 

 

 

 

 

 

 

 

 

 

 

 

 

이기붕별장

강원 고성군 거진읍 화포리

033-680-36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