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361호 서울 영휘원과 숭인원 (서울 永徽園과 崇仁園)

2013. 1. 22. 14:00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가지정 문화재

 

 

 

 

 

사적 제361호 서울 영휘원과 숭인원 (서울 永徽園과 崇仁園)

 

 

 

영휘원은 조선 고종황제의 후궁인 순헌귀비 엄씨의

원(무덤)이고, 숭인원은 조선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황태자(영왕, 영친왕이라고도 함)의 큰아들 이진의 원이다.

 

 

순헌귀비 엄씨는 엄진삼의 장녀로 8살에 입궐하여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이 되었다가 1897년 아들 은을 낳아

 귀인이 된 후 순헌황귀비 칭호를 받고 경선궁에 살았다.

그 후 여성들의 신교육을 위해 1905년 양정의숙과 1906년

진명여학교을 설립하였고, 명신여학교(현 숙명여자대학교)가

재정난을 겪자 200만평 땅을 기증하기도 했다.

 

 

 

 

 

 

 

 

 

엄귀비는 일본이 고종황제를 태왕으로, 순종황제는 조선왕으로,

순종황제의 이복동생인 의민황태자를 영친왕으로 강등시킨

시기를 보냈으며, 의민황태자가 일본에 볼모로 간 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훈련받는모습도 활동사진으로 보게 된다.

 1911년 7월 20일, 춘추 58세에 서거하여, 순헌(純獻)의 시호가 내려지고,

8월에 양주 천수산(天秀山)에 무덤을 만들고, 원호를 영휘라 하였다.

 신위는 청와대 경내 칠궁에 있는 덕안궁에 모셔져 있다.

 

 

 

 

 

조선(朝鮮)제(第)26대(代) 고종황제(高宗皇帝)의 계비(繼妃)인

순헌귀비(純獻貴妃) 엄씨(嚴氏)(1854∼1911)의 묘소(墓所)이다.

엄귀비(嚴貴妃)는 철종(哲宗) 5년(年) 증찬정(贈贊政) 엄진삼(嚴鎭三)의

장녀(長女)로 태어나 8세에 경복궁(景福宮)에 입궐(入闕)하여

민비(閔妃)의 시위상궁(侍衛尙宮)이 되었다. 민비(閔妃)가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시해(弑害)된 후 아관파천(俄館播遷)때 고종(高宗)을

모시고 후궁(後宮)이 되어 영친왕(英親王)(이은(李垠))을 출산하였다.

1911년 7월 20일 58세로 별세(別世)하였으며 위패(位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에 있는 칠궁(七宮)에 봉안되어 있다.

 

 

 

 

 

 

엄귀비(嚴貴妃)는 신교육(新敎育)에 관심을 갖고 양정의숙(養正義塾)

(1905 광무(光武)9년(年))과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1906년(年))를 설립(設立)하였으며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현숙명여학교(現淑明女學校))의 설립에도 거액을 기부하는 등

근대교육발전(近代敎育發展)에 크게 공헌하였다. 영휘원(英徽園) 경내에는 손자(孫子)

 이진(李晋)(영친왕(英親王)의 자(子))의 묘(墓)가 있으며 원래 이곳은 이왕가(李王家)의

가족묘지(家族墓地)로 정해 놓았던 곳이며 명성황후(明成皇后) 민비(閔妃)의 릉(陵)인

 홍릉(洪陵)이 있었으나 1919년(年) 3월(月) 경기도 남양주시(당시 미금시)

금곡동에 고종황제(高宗皇帝)와 합장하기 위해 천장하였다.

 

 

 

 

 

 

묘(墓)의 시설로는 봉분(封墳)(병풍석무(屛風石無)) 곡장(曲墻) 혼유석(魂遊石)

문인석(文人石) 망주석(望柱石) 장명등(長明燈) 석양(石羊) 석호(石虎) 사초지(莎草地)가

 조성(造成)되어 있고 묘(墓)앞에 정자각(丁字閣) 비각(碑閣) 홍살문(紅箭門)이 있으며

 영휘원과 숭인원을 수호 관리하는 재실(齋室)이 있다. 기록으로는 정자각(丁字閣)

남(南)쪽의 비명(碑名)에 「순헌엄비영휘원(純獻嚴妃永徽園)」이라 각자(刻字)되어 있고

후면(後面)의 비문(碑文)은 「순헌귀비엄씨철종오년갑인십일월초오일생

 기미선입궁광무원년탄왕세자봉귀인사년봉순빈사궁호경선오년진봉비칠년책황비

○○칠월이십일졸서수오십팔세추호순헌팔월이일장우양주천수산인좌원원호영휘

○○(純獻貴妃嚴氏哲宗五年甲寅十一月初五日生 己未選入宮光武元年

誕王世子封貴人四年封諄嬪賜宮號慶善五年進封妃七年冊皇妃○○七月二十日卒

逝壽五十八歲追號純獻八月二日葬于楊州天秀山寅坐原園號永徽○○)」하고 기록되어 있다.

 

 

 

 

 

 

 

 

 

 

 

 

 

 

 

 

 

서울 영휘원 산사나무 (서울 永徽園 산사나무)

천연기념물  제506호

 

이 나무는 높이 9.0m, 가슴높이 둘레 2.0m에 나이는 150년으로 추정되는 노거수(老巨樹)이다.

한 아름이 훨씬 넘는 큰 규모에 줄기의 골 모습도 특징적이고 수형 또한 아름다워

우리나라 산사나무를 대표하며, 엄귀비의 무덤 앞에 위치하는 문화적 가치도 있다.
산사나무는 늦봄에 피는 하얀 꽃과 가을에 익는 아기사과 모양의 빨간 열매가 특징이다.

그 열매는 산사자(山査子)라 하여 해열제로 쓰인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있고

 산사주(山査酒)를 담가 약술로 먹기도 한 전통나무이다. 그러나 현재는 산사나무 중

 이 나무만큼 크게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드물게 되었다.
문화재 노거수는 크기가 큰 은행나무·소나무·느티나무 등

당산목 위주로 보존되고 있는 반면, 민속생활과 함께 해온 다양한 종류의 전통나무들이

 생활양식의 변화로 이용이 줄면서 방치되거나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영휘원 산사나무는

생활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는 전통나무 중 수종을 대표할만한 우수한 자원으로 확인되었다.

 

 

 

 

 

 

 

 

 

 

숭인원

 

숭인원에 안장된 이진은 1921년 8월 일본에서 태어나

 부모(의민황태자, 이방자여사)와 일시 귀국하였으나,

이듬해 5월, 생후 9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의 풍습은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장례를 치룰 수가 없었으나,

 순종황제가 이진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어른의 장례와 같게 치르도록 하고

 원호를 숭인(崇仁)으로 내리고, 할머니인 순헌귀비 엄씨의 영휘원 남측에 조영하였다.

 

 

 

 

 

 

 

 

 

 

서울 영휘원과 숭인원 (서울 永徽園과 崇仁園)

사적  제361호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204-2외

02-962-05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