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용인시 천주교 은이성지(隱里聖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성소요람

2008. 12. 21. 22:03카톨릭 이야기/천주교 성지순례

 

 

 

 

 

 

 

 

 

김대건신부 기념관

 

 

 

 

 

 

 

김대건신부 생가터

 

 

 

 

 

 

 

 



  한국 천주교회의 시작은 타민족이나 타국가에 귀감이 될 만하다. 그 이유는 선교사에 의한 선교가 아닌 우리 민족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앙 공동체를 성장시킨 역사 때문이다. 앵자산의 천진암·주어사에서(1777~1779년) 천주교 교리 연구 및 신앙 실천에 이어 중국 북경에 파견된 이승훈이 1784년 ‘베드로’라는 본명으로 세례 성사를 받고 귀국함으로써 신앙 공동체가 태동되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북경 천주교회를 모방해서 10여명의 신부를 정하고 성무활동으로 성사를 베풀었으며, 2년여간의 가성직제 실시 후 자신들의 잘못을 발견하고 북경 교구 주교에게 서신을 보내어 지도를 받게 된다(1787년 10월).


  우리 선조들이 시작한 교회의 첫 사업으로 우선 성직자 영입을 꼽을 수 있다. 교우 공동체는 점점 더 커져 갔지만 성직자를 없는 상황에서는 정상적인 천주교 신앙생활과 영적인 성장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달은 초창기 지도자들은 그 어느 시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뜨겁게 성직자 필요성의 대한 인식과 더불어 성사(聖事)의 은총을 갈망하게 된다. 이러한 열망은 자연히 성직자에 대한 관심과 존경으로 이어졌으리라 보여진다. 따라서 초창기 때부터 우리 선조들은 계속되는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한 가장 중요한 사업이 성직자 영입과 성소자 발굴, 성직자 양성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첫 소득이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의 입국(1794년)이다. 그러나 성직자를 모셔들인 기쁨도 잠시, 1801년 신유대박해로 조선에 유일한 목자를 잃게 된다. 하지만 조선 교우들의 가슴 속에는 신앙의 보존과 공동체 건설 및 확장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 공동체의 영적 성장을 위해 성직자가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따라서 선교사(성직자) 영입 운동을 계속해 나간다.


  조선교회는 1801년 신유년 대박해 이후 유일한 목자였던 주문모 신부와 평신도 지도자들의 순교로 큰 고비를 맞았지만 박해의 여파가 수그러들 무렵 성직자 영입 운동의 불씨를 살리게 된다. 정하상 바오로를 비롯한 평신도 지도자들은 또다시 성직자 영입을 위해 북경 교구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교황청에까지 서신을 보내게 된다(1811년, 1825년). 그중 1825년에 보낸 서신은 교황 레오 12세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을 만큼 ‘조선의 교회 공동체를 돌보아 주십사’하는 애절한 호소였다. 30여 년 간의 세월을 조선의 교우들은 성직자를 목마르게 갈망하며 기다려야만 했다. 그런데 이윽고 레오 12세 교황의 뒤를 이은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조선 대리 감목구가 설정(1831년)되었으며,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신부들을 영입하게 되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처음 조선 땅에 발을 디딘 프랑스 선교사는 모방(Maubant, 1836년) 나 신부였다. 바로 이 모방 신부에 의해서 한국의 첫 성소자 세 소년이 발탁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난다. 동시에 조선 자체에서도 선발된 세 명의 평신도에게 신학공부를 시켰지만 1839년 기해 대박해로 결실을 보지 못하고, 성직자 세분(나 모방 신부, 정 샤스땅 신부, 범 앵베르 주교)마저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된다. 이제 남아 있는 교우들에게 조선 땅에 한분의 성직자도 남아있지 않은 신앙의 단련이 기다리는 광야의 생활이 또다시 시작된 것이다.


  계속된 박해로 성직자를 잃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던 조선의 교우들, 성직자를 모셔들이기 위해 흘려야만 할 피땀을 마다하지 않았던 선조들의 고귀한 신앙정신은 우리 선조들이 남겨 주신 아주 값진 보물이었다. 더 나아가서 성직자를 청하여 모셔들이는 소극적인 노력에만 그치지 않고 스스로 성소자를 발굴하고 성직자를 양성하는 일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사업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선조들의 노력은 눈물겨운 삶이었다. 기해박해로 성직자를 잃은 교회는 슬픔에 잠겼지만 1845년에 이르러서는 10년 전에 이 땅에서 선발하여 마카오로 유학을 갔던 첫 사제가 들어옴으로 해서 그 결실을 거두게 되어 기해박해 이후 6년이라는 시련의 징검다리를 건너 방인 성직자를 맞이하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세 소년 중 제일 먼저 서품을 받은 사람은 김대건이었다. 그는 중국 상해 근처 ‘김가항’ 성당에서 1845년 8월 17일 여러 명의 조선교우들이 참석한 가운데 사제서품을 받게 되고, 한달여만에 고국 땅으로 돌아오게 되어 조선의 교회 공동체, 조선의 교우들에게 다시없는 큰 기쁨을 안겨 주었다.


  성직자를 존경하고 귀하게 여기는 한국의 교회 전통은 바로 초창기 교회 시대의 선조들의 정신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스스로 깨달은 진리, 신앙의 중심에는 성직자 영입과 성소자 양성이라는 사업이 늘 자리하고 있었고, 많은 선조들의 순교는 이러한 토양 안에서 아름답게 꽃 피웠다. 한국 교회가 아직도 많은 성소자를 내고 있는 이유는 선조들의 피땀을 어여삐 보시어 내려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의 결과임을 깊이 묵상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은 교회 내에서부터 우려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진다. 신앙의 나태함과 취미생활의 몰두하는 신앙인의 태도, 위험한 종교색을 띠고 나타나는 사상에 대한 무분별한 수용, 성소자의 감소를 우려하는 소리, 성직자·수도자들에 대한 인간적인 평가절하와 성소에 대한 무관심은 점점 더해만 간다. 옛 선조들의 아름다운 신앙을 이어받는 중요한 길은 교회 구성원 모두가 성소자 발굴과 양성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다. 이러한 노력은 기도하는 가정의 모습에서, 신앙적인 친교를 나누는 공동체의 삶과 성실한 성사 생활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내를 갖고 실천하는 겸손한 구도자적인 신앙생활에서 가능하다. 성소자 발굴과 양성은 하느님 나라 건설과 확장을 위해 초석을 놓는 교회의 으뜸 사업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반면에 성소자의 감소가 결국 교회 공동체의 현주소 내지는 하느님 나라 완성을 향하는 교회 공동체 내부적 성숙도의 실상을 드러내 주는 표징의 단면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루가 10,2)



1821년 8월 21일 : 출생.
1836년 4월 : 골배마실 이웃의 ‘은이 공소’에서 모방(Maubant)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뒤 신학생으로 발탁.
1836년 12월 2일 : 동료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순명과 복종 서약 후 다음날 마카오로 출발.
1837년 6월 7일 : 중국 대륙을 남하하여 마카오에 도착.
1841년 11월 : 철학과정 이수, 신학과정 입문.
1844년 12월 : 최양업과 함께 삭발례부터 부제 서품까지 받음.
1845년 1월 1일 : 조선교회 밀사와 상봉하여 조선에 귀국.
1845년 3월 : 서울에서 신학생 2명을 지도함.
1845년 4월 30일: 선교사 영입 위해 제물포 출발.
1845년 8월 17일 : 상해 연안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 서품.
1845년 11월~1846년 4월 :은이 공소를 중심으로 사목 활동.
1846년 4월 13일 : 은이 공소에서 미사 후 입국로 개척을 위해 서울로 출발.
1846년 6월5일 : 인천 앞바다 순위도에서 체포됨.
1846년 9월16일: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
1857년 9월 23일 : 가경자로 선포됨.
1925년 7월 5일 : 시복됨.
1949년 11월 15일 : 모든 한국 성직자들의 대주보로 결정됨.
1984년 5월 6일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여의도에서 102위 순교자들과 함께 시성됨.


  언제부터 전해져 오는 말인지 모르지만 생거진천(生居鎭川)이요 사거용인(死居龍仁)이란 말이 있다. 아마도 산수(山水)가 좋고 지세(地勢)가 수려하여 풍수설에서 연유한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렇게 용인지방이 산수가 맑고 인심이 좋기로는 옛날부터 일컬어 왔지만 명승고적이나 역사적으로 큰 사건이 없고, 큰 인물은 배출되지 않았다. 그저 평범하고 소박한 가운데 살아가는 기질이 용인 고장 사람들의 기질이다. 용인의 역사를 보면 백제에 시조 온조왕이 광주 춘궁리에 도읍을 정할 때(B.C. 18년) 고구려와 백제의 경계였고, 고려 때에는 구성현, 처인현, 양지현 등으로 분리되었던 역사가 있다.
  용인 지방에 천주교의 전래가 언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추론해 볼 때 용인과 먼 거리가 아닌 천진암과 경기도 광주 등에 인접한 거리로 보아 다른 지역보다 상당히 일찍 복음이 전해졌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첫 박해인 신유년(1801년)박해 때부터 각지에 흩어진 교우들이 이곳 용인 지방으로 숨어들었고, 이들이 용인 지방에 전교한 장본인으로 보여진다. 용인 지방에는 오래된 전설을 갖고 있는 교우촌으로 사리틔(현 용인시 이동면 서리)에 전해오는 ‘신부터’, ‘붉은고개’에 관한 이야기와 태화산 중턱에 성지굴(聖地屈)이라는 이름이 있다. 문헌상으로는 1827년 정해 박해 때 경상도 상주 잣골에서 살다가 포교에게 잡혀 전주 감옥에서 1839년 순교한 신태보 베드로가 오래 전에 경기도 용인 지방으로 피신했었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그때 이미 순교자의 2~3가족이 용인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 준다. 이로써 1815년 을해박해 때 이미 용인 지역에 교우들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멀게는 1801년 전후, 또는 1815년 이전에 박해를 피해 서울, 충청도, 멀리는 경상도 등지에서 떠나온 교우들이 교우촌을 형성하여 살았다고 보여진다. 용인 지역에 알려진 교우촌으로는 은이, 골배마실, 한터, 사리틔, 먹뱅이, 한덕골, 손골, 고초골, 용바위, 모래실 등이 있다.


  김대건의 본관은 김해이고, 증조부는 김진후(金震厚, 비오, 1738~1814)이며, 조부는 김택현(金澤鉉)이다. 부친은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 1796~1839년) 성인이며 모친은 고 우르술라로 선대때부터 여러대에 걸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충청도 솔뫼에서 살아왔다. 김대건은 1821년에 탄생하였고 아명(兒名)은 재복(再福)이며, 보명(譜名)은 지식(芝植)으로 관명(冠名)은 대건(大建)이다. 김대건의 가문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은 증조부 김진후였다. 그는 1791년(신해박해)에 체포되어 1801년(신유박해) 때에 유배되었다가 1805년 다시 잡혀 충청도 해미에서 10년 간의 옥중 생활을 하던 중 1814년에 순교하였다.
  김대건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였던 ‘골배마실’이라는 지명은 배마실이라는 동네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즉 배마실(현 양지성당 소재지)은 옛날부터 첩첩산중인데다 뱀과 전갈이 많이 나오는 지역이라서 뱀마을, 즉 ‘배마실’이라고 불러왔다. 그리고 김대건의 가족이 거주하던 집은 배마실까지 이어지는 골짜기 안에 있어 ‘골배마실’이라고 붙여졌다.
  소년 김대건이 세례성사를 받게 된 때는 한국에 프랑스 선교사로서 처음 입국한 나 모방 신부로부터 15세 되던 해인 1836년 은이 공소에서였다. 그러나 소년 김대건은 세례는 받지 않았어도 곧바로 신학생 후보로 선발이 된 사실로 미루어 보아 가정에서 이미 교리 공부와 기도 생활은 착실히 배워 실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816년 이후 시작된 평신도 지도자들의 꾸준한 성직자 영입 운동이(매년 중국교회를 방문했던 시기) 무르익어 결실을 앞두고 있던 때였기에 소년 김대건은 성직자에게 직접 세례 성사를 받고자 하는 뜻을 갖고 기다렸음이 확실하다.
  이처럼 골배마실 성지는 김대건의 소년 시절의 향취가 남아 있는 곳이요, 성소의 꿈을 키우던 장소이다. 조선 땅에 이제 곧 오실 신부님을 기다리며 기도하고, 교리를 익히고, 조선 교회의 미래를 위해 한 몸을 바치고자 하는 포부를 가슴에 담고 살았던 장소이고, 세례성사와 첫 영성체를 준비하면서 설레는 마음을 간직하고 생활했던 곳이다.
  골배마실은 옛날부터 양지 교우(신자)들 사이에 김대건 신부의 가족들이 살던 집터로 구전되어 왔었다. 하지만 이곳을 발굴하게 된 때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골배마실 성지는 1961년 양지 본당 5대 주임이었던 정원진 루가 신부에 의해 발굴이 시작되어 돌절구와 갖가지 생활 도구, 즉 맷돌, 우물터, 구들장 등을 발견하면서 성지 개발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1997년에는 40년 가까이 옛 모습 그대로 있던 성지를 새롭게 단장하게 되었는데, 새로이 청동으로 제작된 2M짜리 성상을 모셔 7월 5일 대축일을 맞아 축성하였고 처음 골배마실 성지에 모셔졌던 성 김대건 신부 성상은 양지성당 정원에 모셔 지금에 이르고 있다.


  조선의 교우들은 항상 예고 없이 닥친 박해로 어렵게 모셔들였던 성직자를 번번이 잃게 되어 쓰라린 슬픔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러던 중에 이미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 길에 올랐던 본방인(한국인) 사제를 맞이했던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으리라. 이제 한국인 사제로는 처음 서품되어 귀국 길에 오른 김대건 신부는 고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강경 부근의 황산포(나바위)에 무사히 상륙하여 사목 활동에 임하게 된다.
  고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 활동 지역은 은이를 중심으로 용인, 이천, 안성 지역 등지에서 이루어졌다. 은이는 박해 시대 숨어살던 천주교 신자들에 의해 이룩된 교우촌이고, 은이(隱里)라는 말 그대로 ‘숨겨진 동네’, 또는 ‘숨어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김대건 신부는 은이를 중심으로 경기 이천, 용인, 안성지방을 두루 다니며 사목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바로 이 은이성지는 이미 유학 길에 오르기 전, 1836년 나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 성사와 첫 영성체, 그리고 신학생으로 선발된 곳이기도 하다. 또한 처음으로 조선 교회 안에 자발적으로 시작된 성소자 양성의 결실을 맺은 곳이 ‘은이성지’이다. 이렇게 은이는 김대건 신부에게 있어 첫 사목 지역이었고 조선 천주교회의 역사상 본방인 사제가 사목한 최초의 본당이었다. 이 시기에 김대건 신부는 경기지방의 은석골, 텃골, 사리틔, 검은정이, 먹뱅이(묵리), 한덕골, 미리내, 한터, 삼막골, 고초골, 용바위, 모래실, 단내 등지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베풀고 사목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당시에 행하신 김대건 신부의 사목 활동 모습은 1866년(병인박해)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정은 바오로 가문에 정 레오 신부에 의해 다음과 같이 전해 온다. “집안 어른들께서는 김 신부님께 성사(고해성사)받던 이야기를 하시곤 했는데 김 신부님은 항상 밤으로만 다니셨다 한다. 미사짐도 없이 단내(丹川)에서 10리가 채 못되는 동산 밑동네(東川里)에서 오시어 고해성사만 주시고 바로 떠나셨다 한다. 김 신부님과 복사가 깊은 밤중에 대문밖에 오시어 ‘정생원! 정생원!’ 하며 증조부 바오로를 찾으시는 소리에 식구들은 모두 잠을 깨었으나 누가 무슨 일로 찾는지 두려워 주저하게 된다. 복사가 작은 목소리로 ‘김 신부님께서 성사 주러 오셨으니 주저하지 말고 빨리 나오시오’하는 말에 깜짝 놀라 일어나 증조부 바오로께서는 이웃이 알까 쉬쉬하며 반가이 신부님을 방으로 뫼시고 곧 성사 받을 준비를 하는데 그 준비는 간단하였다. 벽에 깨끗한 종이를 한 장 붙이고 그 위에 십자가상을 정성되이 뫼셔 건다. 김 신부님께서는 10여명의 고해자들에게 성사를 주시고 다시 배마실(현 용인시 양지면 남곡리 양지성당 소재지)로 가시어 거기서 성사를 주시고 ‘은이’로 가시면 날이 샌다고 하신다.” 이 증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험한 산길을 밤으로만 다니면서 사목 활동을 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렇게 6개월 간의 사목 활동을 하시던 중 고(高) 페레올 주교의 명령이 새롭게 주어진다. 그 명은 중국에 체류하고 있는 선교사들과의 연락, 또 곧이어 조선에 입국해야 할 매스뜨르 신부와 최양업 토마스 부제의 입국로를 알아보기 위한 임무였다. 따라서 김대건 신부는 또다시 어머니와 생이별을 하게 되는데, 이때의 이별이 모든 교우들이 예상했듯이 마지막 이별이 되었다.
  1846년 4월 13일 김대건 신부는 은이 공소에서 교우들과 마지막 미사를 봉헌한 후 조선 교회의 숙원 사업인 성직자 영입이라는 중요한 임무를 띠고 길을 떠나게 된다. 은이를 떠나시기 전에 김대건 신부는 교우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다.
  “험난한 때에 우리는 천주님의 인자하심을 믿어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거룩한 이름을 증거 할 용맹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구합시다. 지금 우리의 주위에는 검은 마귀의 손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내일의 삶을 모르는 위급한 처지에 처해 있는 우리들입니다. 내 마음과 몸을 온전히 천주님의 안배하심에 맡기고 주 성모님께 기구하기를 잊지 맙시다. 다행히 우리가 살아 있게 된다면 또 다시 반가이 만날 날이 있을 것이오. 그렇지 못하면 천국에서 즐거운 재회(再會)를 합시다. 끝으로 내 홀로 남으신 불쌍한 어머님을 여러 교우 분들이 잘 돌보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이 말씀을 은이 공소와 용인 지방 교우들에게 유언(遺言)으로 남기시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셨다. 교우들은 떠나시는 신부님의 모습을 은이성지에서 1Km 정도 떨어진 ‘중담’ 모퉁이까지 나와 눈물로 전송했다.
  그동안 교회 내에서 잊혀져 왔던 은이성지의 개발은 1992년 6월부터 시작된 서울교구 주평국 신부의 ‘도보성지 순례’를 계기로 알려지고, 1996년 5월 은이 공소터 530여평을 매입하면서 시작되었다. 같은해 6월에는 야외제대와 김대건 신부 성인 상을 세우고 성상 축복식을 거행하게된다. 또한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을 맞아 시작된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 건립 추진’ 운동도 시작되고, 2002년에는 은이성지 주변 5200여평 매입과 이어 2003년 사제관과 성당, 숙소 건물을 포함한 1200여평을 매입하면서 그해 9월 성지 전담신부 발령으로 본격적인 은이성지 개발이 시작되었다.


  성직자의 입국로를 준비하기 위해 인천 앞 바다에서 활동하던 김대건 신부 일행은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순위도에서 포졸에게 1846년 6월 5일 체포되셨고 많은 고초를 당하게 된다. 해주 감영에 이어 포도청으로 이송된 김대건 신부는 40여 차례의 모진 심문을 당한다. 하지만 이 시기에 ‘세계 지도’와 ‘지리 개설서’를 저술하는 등 조선의 조정 대신들에게 한국 최초의 서양 학문을 직접 익힌 선각자로서 서양 학문을 일깨워 주는 활동도 하게 된다. 김대건 신부는 처형되기 보름 전에 마지막으로 조선 교우들에게 보내는 ‘회유문’을 작성하게 된다. 그리고 그 해 9월 15일에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다음날인 9월 16일에는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의 월계관을 받게 된다.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당시 은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사목관할 내에 살던 먹뱅이(묵리)의 이민식(빈첸시오)과 몇몇 교우들이 몰래 빼내어 10월 26일에 안성 미리내에 안장하였다. 현재로 말하면 김대건 신부가 사목하던 본당 청년 신자들이 앞장서서 죽음을 무릅쓰고 모셔와 안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교우들은 생전에는 사목 활동을 위한 길이오, 순교하신 뒤에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모셔 갔던 이송 길을 김대건 신부님의 신앙 열정과 순교 정신을 본받고자 기도하며 순례하기 시작하였고, 은이 성지에서 미리내 성지에 이르기까지 넘어야 할 세 고개를 신덕(信德)고개 (은이 고개), 망덕(望德)고개 (해실이 고개), 애덕(愛德)고개(오두재 고개)라 이름지어 부르며 고귀한 김대건 신부님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회장, 참수(44세, 1839년 9월 26일)
  김대건 신부님의 부친으로 골배마실에 거주하시다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1839년 기해대박해 때 순교하셨다. 어쩌면 아들인 김대건 소년에게 신앙을 전해주고 보살펴준 공은 첫한국인 사제 순교자이신 아들에 그늘 가려져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은이[골배마실]성지에서는 김대건 신부님의 부친이신 성 김제준 이냐시오의 삶도 조명하며 공경하고자 한다.

생애 : 김제준 이냐시오는 1814년 순교한 김진후 비오의 손자이며, 뒷날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신부가 된 김대건 안드레아의 부친으로서, 일찍부터 착한 교우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는데, 그는 여러 차례의 박해를 피해 어려서부터 부친과 함께 산골로 숨어살았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외국으로 유학시켰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온 집안이 몰살하게 될 줄을 뻔히 알면서도 그 아들을 중국 마카오로 보낼 만큼 열심한 교우였다. 기해년 9월 중순에 그의 사위이던 곽이라는 자가 배교자 김여상(순성)과 10여명의 포교를 거느리고 그의 집[골배마실]으로 몰려드니, 몇 사람을 집어치울 정도로 힘이 세었던 그는 조금도 반항함이 없이 포승을 받았다.
  그는 국사범(國事犯)으로 인정되어 더욱 가혹한 형벌을 받았으므로 그만 견디지 못하고 배교하였다. 그러나 한편 배교한다 할지라도 아들을 외국에 보낸 죄까지 사해질 수는 없어 그는 결국 사형 선고를 받았다. 감옥에 있는 교우들은 배교한 그의 죄가 얼마나 크다는 것과, 한편 배교한 행위가 풀려 나가는 데에는 아무 소용도 없다는 사실을 일러주며, “놓여 나가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의심 없이 처형됩니다. 그러니 마음을 돌려 당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재판관 앞에 나가 배교하겠다고 선언한 사실을 취소하고 순교자로서 세상을 마치도록 하십시오”라고 거듭 권고하였다. 그는 형조로 옮겨졌을 때 진정으로 통회하고 결심을 새롭게 하여 순교를 준비하였다. 그는 3회에 걸쳐 잔악한 형벌을 받은 후, 44세의 나이로 목을 잘려 순교하였다.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 갈바리아로 올라가는 십자가의 길에서 사람은 누구나 넘어질 수 있다. 예수님의 으뜸제자였던 베드로도 용감한 사도였으나 넘어졌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에 찬 시선을 받아 다시금 통회의 눈물을 흘리며 일어섰다. 김제준 이냐시오도 사도 베드로와 같은 모습으로 배교하기 전보다도 더 강한 신앙의 자세로 우뚝 설 수 있었다.
  1839년 9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김제준 이냐시오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한 순교 성인들은 허계임 막달레나(68세), 박봉손 막달레나(44세), 전경협 아가다(53세), 홍금주 뻬루뻬뚜아(36세), 김효임 골롬바(26세), 김유리대 율리에따(56세), 조신철 가롤로(45세), 남이관 세바스띠아노(60세) 등 아홉 분이다.

  우리는 참으로 나약한 인간이라서 어려움에 처할 때 넘어질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용기는 넘어졌을 때 절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자세이다. 우리도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하여 실망하지 말고, 범죄 하였을지라도 즉시 통회의 눈물로 다시 일어서기로 결심하자.

  군문효수(35세, 1839년 9월 21일)
  한국에 처음으로 입국한 프랑스 선교사로서 박해로 피폐된 조선교회를 재건하는데 초석을 놓았던 성 나 모방 신부님을 우리 교회가 잊어서는 안된다. 더욱이 성직자 영입에 무수한 피땀을 흘렸던 교회 역사에서 방인사제 양성을 위한 첫걸음을 준비하신 노고는 곧 한국인 첫사제인 김대건 신부님으로 첫결실을 맺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성인을 공경함으로서 민족을 초월한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는 기회가 되도록 해야 하겠다.

생애 : 모방 신부는 한국 성은 나(羅)씨이고, 이름은 본명인 베드로를 한문으로 표기하여 백다록(白多錄)이라 하였다. 1803년 9월 20일, 프랑스 바시(Vassy) 지방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열성적이 면과 부지런함이 뛰어났다. 그리고 항상 "세계의 끝까지 가서 우상을 숭배자들에게 포교를 하겠다”고 말하였으며, 이러한 전교의 의지는 결국 그의 일생을 통하여 실현되었다. 그는 1829년 5월 13일 사제로 서품된 후,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선교사로서의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3년 뒤에 중국 사천성 포교지에 임명되었다. 포교지로 가던 도중 그는 조선의 초대 교구장인 브뤼기에르 소 주교를 마나게 되었는데, 이 때 조선의 상황을 듣고는 곧 주교와 동행하기를 희망하였다. 주교는 그의 경건함과 열성적인 면을 생각하여 기꺼이 조선의 선교사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소 주교가 입국도 하지 못하고 선종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1835년 11월 21일에 장례를 마쳤다. 그때 주교를 영접하기 위해 와 있던 조선신자 다섯 명을 만나 조선입국을 계획하였다. 다행히 그의 얼굴 모습은 조선인을 닮았었다.
  1836년 1월 13일 밤중에 의주의 남북 두 성을 통하여 입국에 성공하였다. 이로써 서양 선교사로서는 첫 발을 딛은 것이다. 그가 몰래 입국을 하는데 얼마나 큰 고역을 치르었는지 그의 편지에서 보면

"나는 조사를 받는 동안 정신을 잃을 정도로 벌벌 떨었다. 이로부터 밤과 낮을 굶으면서 달리어 1백리를 걸었다. 변문으로부터 조선의 검문소에까지 이르는 사이에는 사람이 없고 황무지로 되어 있어서, 호랑이와 이리떼만이 돌아다니는 언덕과 골짜기가 가로 놓여 있었다. ... 나는 머리에 상투를 틀어 얹고 얼굴에는 누렁 칠을 하고 병들어 앓는 사람 모양으로 모래 위에 넘어져서 끙끙내고 앓은 소리는 내었다. ...”
  조선에 입국한 후, 모방 신부는 조선어를 배우려고 노력하였으나 교우들의 요청으로 우선 한문으로 성사를 주기 시작하였다. 서울에서 시작하여 다음에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16내지 17개 교우촌을 돌며 포교를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 해 12월까지는 어른 213명에게 영세를 주고, 6백여명 이상에게 고해성사를 줄 수 있었다. 또한 가는 곳마다 회장들을 뽑아 주일과 축일에 교우들을 모으도록 하며, 모임에서는 공동으로 기도를 드리고 교리문답과 복음성가와 성인전기 등을 배우도록 지도하기도 하였다.
  그의 사목활동 중 특기해야 할 것은 한국인 방인 성직자 양성이다. 그는 최양업 토마, 최방제 프란치스꼬 사베리오, 김대건 안드레아 세 소년을 가리어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에 필요한 덕행을 쌓게 하였다. 1839년 12월 2일에 마카오로 보내니 이들은 이씨조선 500년 역사를 통하여 해외로 파견된 최초의 유학생들이 되었고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서양학술을 배운 선각자가 되었다. 1837년 1월 15일에 샤스땅 신부가 서울에 도착하게 되니 모방 신부는 양근 땅으로 내려와 열심히 조선말을 배워 본격적인 전교를 했으나 1837년 7월 중순에 과로와 영양부족으로 열병에 걸려 위독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샤스땅 신부에 의해 병자성사를 받게 되었는데 샤스땅 신부가 성체를 모시고 그 방의 문지방은 넘어 설 때 병이 다 나으리라는 느낌을 갖게 되었고 과연 병이 나아서 3개월 후에는 다시 일 할 수 있었다. 이 두 신부가 1837년 한해에 1,237명에게 세례성사와 2,078명에게 고해성사를 주었으며 1,950명에게 성체를 모시는 즐거움을 주었다.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던 신자들이 신자 마을을 만들어 살게 하고 어린이 세례, 혼인, 장례, 주일과 축일의 모임, 말썽거리 해결 등에 관한 지침을 정하여 주었으니 혼자서 자라 온 조선교회에 일정하 조직과 법칙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는 범 주교의 권유로 자수하여 범 주교와 샤스땅 신부와 함께 무수한 고문을 당한 다음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를 당했다. 그가 자수하지 전에 남긴 편지 한 토막들 소개한다.

“... 많은 장애를 뚫고 우리를 이 포교지까지 인도하여 주신 천주님의 섭리는 우리가 누리고 있던 평화가 가혹한 박해로 혼란된 것을 하락하셨습니다. ... 오늘 9월 6일 우리에게 순교하러 나오라는 주교님의 두번째 명령이 왔습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미사성세를 드리고 나서 떠나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성 그레고리오와 함께 나에게는 영광으로 가는 길이 하나 뿐이니,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음을 원하노라 라고 말할 수 있는 은 얼마나 위로가 되는 것입니까? 맛이 달고, 쉬기 좋은 그늘을 주며, 승리를위하여 우리대신 하느님의 인자에 천만 번 감사 드려 주시며, 우리 가엾은 신앙자들에게 구원을 보여 주시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1839년 9월 6일).

  양들이 잡혀가는 것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자수하는 목자들의 심정은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 산으로 오르는 예수님의 심정과 같은 구원자의 마음이라 하겠다. 우리도 이웃의 구원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사랑을 가진 사람으로서 사랑을 베풀도록 힘써야 하겠다.

  회장, 장살(48세, 1846년 9월 20일)
  김대건 신부님이 체포되신지 한달 후 들이닥친 포졸들에게 한이형 라우렌시오 성인이 체포되신 곳은 다름아닌 은이마을 자신의 집에서였다. 성인은 곧바로 서울로 압송되지 않으시고 자신의 집 대들보에 달아매져 모진 심문을 받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모진 고문과 괴롭힘에도 굴하지 않으신 신앙적 절개가 배어있는 곳이 은이마을이었고, 생전에 복음의 이상을 실현하신 장소가 또한 은이였다. 성인을 고문하고 괴롭힌 포졸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의 신앙적 강건함을 보여주신 성인을 그분이 신앙의 수련장으로 살아오신 은이성지에서 공경함은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생애 : 은이에서 훌륭한 신앙인으로 생활하시다가 김대건 신부님의 체포와 관련된 죄인으로 순교한 한이형 라우렌시오 성인은 은이와 각별한 인연이 있다. 본래 한이형 라우렌시오는 충청도 덕산(德山) 고을의 양반 자제로 1799년 태어났다. 곧고 헌신적이며 꿋꿋한 성격을 지닌 그는 14세 때에 천주교 교리를 배워 즉시 열심한 마음으로 입교했다. 그 후부터 그는 몇 시간 동안에 십자가 앞에서 묵상에 잠기며, 자기 죄에 대한 진실한 통회를 하였다. 그리고 주일과 축일에는 집에서 10리 밖에 있는 교우 마을에 가서 신심행사에 참례하였는데,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날씨가 나쁘거나 거르는 일이 없었다. 21세 되던 해에는 교우 처녀와 결혼을 하고 즉시 용인지방 양지의 ‘은이’ 산골로 이사하여 생활하였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는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집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주막집 같았다. 그는 가난하고 궁핍한 모든 사람들을 기꺼이 맞아들였고, 누더기 옷을 입은 사람을 만나면 자신의 옷을 그들에게 주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을 지나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헐벗은 이웃을 입히고 그의 주린 배를 불려 주는 것은 거저 주는 것이 아닙니다. 때가 오면 하느님께서 두둑한 이자를 붙여 돌려 받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낮에는 농사일을 하였는데 아무리 일이 바빠도 파공(罷工)을 지키고, 사순절 40여일 동안에는 매일 대재(大齋)를 지켰다.
  이러한 한이형은 범 앵베르 주교가 들어오자 눈에 띠게 되어 그를 전교회장으로 명하였으며, 그도 역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1846년 김대건 신부가 체포된 후 7월에 서울의 포졸 20여명이 그가 살던 은이 마을을 습격하여 그의 집을 에워쌌다. 그리고 우선 집안 식구들을 모두 체포하였다가 곧 다른 사람은 풀어 주고, 한이형 만을 옷을 벗기고 대들보에 매달아 심한 매질을 하며 배교하고, 공범을 대라고 명령하였다. 그가 거절하자 포졸들은 그의 다리를 묶고 두 발 사이에 깨지 사기그릇의 작은 조각들을 끼우고 다리에 굵은 밧줄을 감고는 앞뒤로 번갈아 가며 잡아당겨 톱질을 하여 살을 으스러뜨렸다. 이 참혹한 형벌을 참을성 있게 견디어 내자 포졸들은 감화를 받아 다른 신자들에게 “당신들도 정말 천주교인이 되려거든 한이형 처럼 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런 고문을 치른 후에 한 라우렌시오는 포졸들에 의해 서울로 압송되었다. 포졸들이 그에게 말을 태워 주겠다고 하였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고 상처 때문에 신발을 신을 수 없었지만 백 여리나 되는 산길을 걸어서 서울까지 가게 된다. 그는 서울에 도착해서도 전과 같은 고문을 받았으나 조금도 굽히지 않고, 결국 9월 20일에 48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선고받아 순교하게 된다.

 

 

글출처:http://www.euni.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