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4. 20:29ㆍ카톨릭 이야기/영성의 샘물
튤립 [tulip]
천국에서 작은 자가 되지 않으려면
흔히 마태오복음서는 유다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목적으로 쓰여진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루카복음서가 이방인을 대상으로 한 것과 선명하게 대조되는 부분이지요. 헬라적 문체와 사고방식으로 집필된 요한복음과 비교해 보아도 마태오복음의 독특성은 분명합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오복음서의 그런 일면을 잘 보여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께서 율법을 부정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잡수셨고 병자를 고치셨으며 창녀와 세리들과 함께 먹고 마신 일 등은 분명 당시의 율법적 기준으로 보면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율법을 부정한 자로 여겼고 그로써 하느님을 부정한 죄목을 씌워 그분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율법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케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강조합니다. 이는 비단 마태오복음이 아니더라도 성경 도처에 깔려있는 기본 생각이기도 하지요. 정의를 완성시키는 일이 사랑임을 안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율법 중의 율법이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받은 십계명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광야 40년간의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도 유다 공동체가 유지되었던 것은 실로 이 십계명 때문이었지요. 십계명 속에는 한 공동체를 지탱하기 위한 인간 상호간의 약속과 여러 조건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익히 알고 있듯이 예수께서는 이 십계명의 정신을 요약하여 다음과 같은 두 명제로 요약해 주셨지요.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마르 12,33)”입니다. 위대한 교부 성 아우구스티노도 이 정신에 입각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것을 하라.”는 말을 한 바 있습니다. 문자로서 율법이 아니라 정신으로서 율법을 실천하는 예수님은 말로만 살던 당시 성직자들에게 위험한 존재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율법주의의 폐해는 오늘날에 우리 교회 안에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율법이 부정적으로 이해된 것은 문자주의적 특성과 함께 보상원리로 이해되었기 때문이지요. 율법은 본래 사람을 살리고 공동체를 지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자신들도 문자주의에 빠져 교회 내 일체의 행위가 보상을 바라는 일로 전락하지는 않은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헌금을 바치고 봉사를 하는 일이 자신의 업적으로 치부되고 보상을 바라는 일이 된다면 우리 교회는 그 옛날 예수님께서 싫어했던 율법주의와 다름이 없겠지요. 율법의 정신을 살고 있지 못한 우리에게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가 될 것이란 예수님의 말씀에 정신이 번쩍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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