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과 거지

2009. 4. 3. 17:50카톨릭 이야기/영성의 샘물

 

 

 

 

 

 



우리들의 혼이 생각지도 않은 때에,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자기와 너무 닮은 혼을 만난다는
사실은 참으로 인생의 경이로운 일 중의 하나라고 할 수밖에 없다. 프란치스꼬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의 회견 때 바로 그러한 체험을 가게 되었다. 그 뛰어난 인물도 광신적
색채를 띤 일에 대해서는 프란치스꼬와 마찬가지로 철저한 불신감을 갖고 있었다. 첫 번째
알현에서 이미 프란치스꼬는 교황의 날카롭게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의 배후에 생동하고
있는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교황의 눈길은 프란치스꼬의 어두운 마음 구석구석을 꿰뚫는
빛의 화살과 같았다. 그러나 알현이 끝났을 때 교황이 생각하고 있는 일이 어떤 것인지
프란치스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미결인 채 프란치스꼬는 교황의 앞을
떠났다.
후에 교황이 프란치스꼬에게 이야기한 바에 의하면 그날 밤 그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교회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라떼란의 성요한 성당이 눈앞에서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더니 땅 위에 쓰러져갔다. 성당이 거의 땅에 무너져내리는 순간 한 작은 거지가
어둠 속에서 뛰어나와 쓰러져가는 건물을 자신의 어깨로 받쳤다. 겨우 안심하는 순간 잠을
깼다. 너무나 생생한 꿈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교황은 그 거지가 바로 낮에 만났던
아씨시의 빈자 프란치스꼬임을 분명히 알았다.

이미 말한 것처럼 교황은 꿈같은 것은 전혀 신용하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이번의 꿈만은
거스르기 어려운 힘을 느꼈다. 그는 프란치스꼬와 형제들을 다음날 다시 불렀다.
프란치스꼬가 교황 인노첸시오 안에서 자기와 같은 마음을 발견한 것은 그 알현 때였다.
교황의 온 인격이 어린이와 같이 단순하면서도 진지함과 성실함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는 프란치스꼬가 구걸을 하기 위해 만난 사람들과는 달리 정면으로 프란치스꼬의 눈을
주시하였다. 프란치스꼬는 그 솔직성과 천진함을 평생 잊지 못하였다. 인노첸시오(
천진함)라는 이름은 기실 얼마나 그에게 적합한 이름이었던가.

프란치스꼬가 긴 시간을 두고 신중하게 꿈이야기를 설명하여가는 동안 교황의 눈이 젖기
시작했다. 그 눈은 프란치스꼬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 그 순간 프란치스꼬는 그 꿈이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았다. 동시에 엄격하지만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교황이
그 꿈을 하느님 교회의 계시로 받아들여줄 것도 알았다.

인노첸시오는 사실 그 이상의 일을 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프란치스꼬를 끌어안았다.
프란치스꼬는 호화로운 옷에 싸여 있는 마음으로부터 자기와 똑같은 가난에 부서진 마음의
고동을 들었다. 그 마음은 할 수만 있다면 교황의 지위를 벗어나 그리스도를 위해 거지의
무리 속에 들어갈 것을 원하고 있었다. 프란치스꼬는 울음을 터뜨렸다. 꿈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부드러운 포옹이, 언제나 기대하면서 결국은
얻을 수 없었던 아버지의 포옹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프란치스꼬에게 교황은
손에 닿는 그리스도 대리 이상의 것이 되었다. 한번 잃어버렸지만 백배로 돌려받은
아버지라고 했으면 좋을까. 인노첸시오 교황에게 있어서도 프란치스꼬는 잃어버렸다가
백배로 돌려받은 아들이었다.

추기경들은 알현실 한가운데에서 거침없이 연출된 이 감동적인 장면에 어리둥절하여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도 멜로드라마같은 정경에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중에는 그 장면의 의미를 이해하고 눈시울을 적시는 이도 있었다.

인노첸시오 교황은 겸허한 태도로 간결하게 이렇게 선언했다. "작은 형제들이여, 하느님과
더불어 사십시오. 주께서 당신께 나타내주시는 바를 따라 구원을 널리 펴십시오. 그리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당신들의 친구 수를 더욱 늘려주시거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십시오.
당신들에게 더욱 큰 은혜를 내리리다."

더욱 큰 은혜, 교황의 팔에 안겨 느낀 것은 진실이었다. 프란치스꼬는 다시 아버지의 집에
받아들여져 새로운 영적 재산의 주인이 된 것이다. 그날 이후 인노첸시오와 프란치스꼬는
아버지와 아들로서 지냈다. 그리고 프란치스꼬는 교황 인노첼시오를 언제나 작은 형제의
한 사람으로 생각했다.